신문은 선생님

[재미있는 과학] 열매 있는 암나무만 악취… 성감별로 수나무 골라 심어요

입력 : 2018.10.04 03:00

[은행 냄새의 비밀]
암수 따로 자라 암나무만 냄새 풍겨
DNA 추출해 성감별 유전자 살펴보니 암나무에 한 개, 수나무엔 두 개 있죠

해마다 가을이 되면 우리의 코를 자극하는 열매가 있어요. 바로 은행나무(Ginkgo biloba)의 열매, 은행이에요. 도심의 가로수 길을 걷다가 자칫 바닥에 떨어진 은행을 밟았다간, 씨를 둘러싼 물컹물컹한 과육이 신발에 묻을 수 있어요. 과육에선 은행나무 특유의 똥 냄새 비슷한 악취가 나지요. 도대체 은행나무 열매는 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일까요?

◇왜 냄새 나는 나무를 가로수로 심을까

은행나무 말고 다른 열매는 대부분 과육에서 상큼한 향이 나고 맛이 달콤해요. 왜 그럴까요? 이건 동물을 유인해 자신의 씨앗을 멀리 퍼뜨리기 위한 식물의 전략이에요. 동물이 열매를 먹으면 과육만 소화되고, 씨는 그대로 몸 밖으로 나오죠. 식물은 늘 같은 자리에 서 있지만, 열매를 먹은 동물이 움직이는 거리만큼 후손을 멀리 보낼 수 있는 거예요.

은행나무도 성별이 있어요
/그래픽=안병현
반면 은행나무 열매는 구린내가 나서 사람이나 동물이 다가가기를 꺼려요. 은행 열매의 겉껍질에 헵탄산(Heptanoic acid)이 들어 있어 심한 악취가 나고, 은행산(Ginkgolic acid) 같은 독성물질이 있어 잘못 만지면 피부가 벗겨지거나 피부염에 걸릴 수 있어요.

왜 하필 냄새도 나고 독성도 있는 은행나무를 길가에 많이 심게 된 걸까요? 그동안 인간은 은행나무 말고도 다른 많은 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봤어요. 특히 플라타너스가 가로수로 주목을 받았어요. 양버즘나무라고도 하죠.

1980~90년대에 가로수 길에 플라타너스 나무를 특히 많이 심었죠. 플라타너스는 장점이 많았어요. 넓은 잎이 자동차 소음을 막아주고 매연이나 먼지도 잘 흡수했어요. 여름철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가을에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청소하기도 쉬워요.

문제는 성장이 너무 빠르다는 점이었어요. 플라타너스가 쑥쑥 자라 고층 건물 유리창이나 간판, 교통표지판을 가리는 일이 잦았어요.

결국 2000년 초반부터 플라타너스 대신 은행나무를 많이 심게 됐어요. 은행나무는 냄새가 나긴 하지만 가로수로 심기에 좋은 점이 많거든요. 은행나무 잎에는 플라보노이드(Flavonoid), 테르페노이드(Terpenoid), 빌로바라이드(Bilobalide) 같은 항균성 성분들이 들어 있어 병충해가 거의 없어요. 또 공해에 강하고 가을철에는 노랗게 잎이 물들면서 거리를 아름답게 해주는 효과가 있지요.

◇DNA 판별법으로 암나무만 심어요

그래도 여전히 은행나무 냄새는 고역이었어요. 과학자들이 뭔가 묘수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은행나무에 화학약품을 발라 열매가 열리지 않도록 해보기도 하고, 열매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수확하려고도 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과학자들이 '은행나무는 암나무만 냄새가 나니, 수나무만 심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식물인데 어떻게 성별이 있냐고요?

은행나무 특징은 냄새뿐만이 아니에요. 식물도 동물처럼 암나무와 수나무, 암꽃과 수꽃이 있어요. 대부분의 나무는 한 그루에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지만,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아예 따로 있어요.

수나무는 열매가 안 달리기 때문에 자연히 냄새도 안 나요. 암나무만 열매가 달리고, 이게 냄새의 원인이지요. 수나무만 골라 가로수로 심으면 도심에서 고약한 은행 냄새를 없앨 수 있는 이유예요.

다만 은행나무가 아직 어릴 땐 암나무와 수나무를 눈으로 구분할 수 없었어요. 은행나무는 묘목을 심은 지 최소 15년은 지나야 수꽃과 암꽃이 피어나거든요.

그러다 2011년 6월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은행나무 잎을 이용해 암수를 식별하는 'DNA 성감별법'을 개발했어요. 은행나무 수나무에만 존재하는 DNA 부위를 찾아낸 거예요. 어린 은행나무에서 잎을 떼어내 DNA를 추출한 뒤, 성감별 유전자를 증폭해서 살펴봤더니 암나무는 유전자가 하나뿐인데, 수나무는 암나무가 가진 유전자 말고도 수나무 특유의 유전자가 하나 더 있었어요.

이 방법으로 1년생 이하의 어린 은행나무도 암수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게 됐어요. 수나무는 가로수용으로, 암나무는 열매 생산용으로 쓸 수 있게 된 거죠. 실제로 2013년 5월 서울 세종로 은행나무 가로수 길 조성사업에서 이 방법을 활용해 수나무만 골라서 심었어요. 그래서 서울 세종로에선 가을철에도 은행 열매 냄새를 맡을 수 없죠.

◇은행나무의 보호 전략일까요

은행나무는 과육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독성도 있어 동물들이 먹지 않는다고 했죠? 다른 식물들은 동물에게 과육을 내주고 그 대신 동물의 몸을 타고 멀리 이동하는 전략을 취했지만, 은행나무는 정반대 전략을 세웠어요. 구린내를 풍겨서 동물에게 먹히지 않는 일종의 '보호 전략'이죠. 열매가 떨어진 자리에서 충분히 익어 그 자리에 뿌리 내리는 길을 택한 거예요.

신기한 것은 깊은 산 속에서는 은행나무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에요. 경기 양평 용문산에 있는 은행나무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은행나무는 깊은 산 속에 자라더라도 인간이 옮겨다 심은 것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은행나무 열매는 인간만이 섭취하고 후손을 다른 곳에 실어 나르고 있어요. 인간이 사는 곳 부근에서만 은행나무를 볼 수 있는 이유죠.

어쩌면 은행의 고약한 냄새와 독성은 은행나무가 자신의 후손을 퍼뜨리기 위해 인간에게만 보내는 '비밀 신호'는 아닐까요?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