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동방정책으로 물꼬 터… 20년후 소련 설득해 통일 이뤘죠

입력 : 2018.09.28 03:00

[독일 통일을 이끈 지도자들]
1969년 공산권과 교류한 브란트 총리
동·서독 UN 동시 가입해 화해 분위기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과 특별수행단 200여 명이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찾았지요.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9월 평양 공동선언'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한때 분단국가였던 독일도 통일 전에는 양국 정상 간 교류가 있었답니다. 1989년 12월 동독 드레스덴에서 있었던 동독과 서독의 정상회담은 통일 물꼬를 튼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어요.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Brandt·1913~1992)와 헬무트 콜(Kohl·1930~2017)의 역할도 컸습니다. 독일은 어떻게 분단됐고 통일을 이끌어내기까지 서독 정상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동서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진 독일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했어요. 서북부는 프랑스, 중앙부는 영국, 남부는 미국, 동부는 소련이 점령했지요. 소련은 점령하고 있던 동독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 했고 이듬해부터 미국과 소련이 대립해 냉전이 시작됐지요. 미국은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서독을 포함해 서부 유럽을 하나의 세력으로 합치려 했어요.

서독 총리 헬무트 콜 모습이에요.
서독 총리 헬무트 콜 모습이에요. /게티이미지코리아
현재 독일 수도 베를린은 소련이 점령했던 동독 중심부에 있었는데 소련이 관할하는 동베를린과 서방 3국(미국·영국·프랑스)이 관할하는 서베를린으로 나뉘었어요. 1948년 소련과 서방 3국 사이가 나빠지면서 소련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이어주는 모든 교통로를 막아버렸어요. 서베를린을 동독 관할로 흡수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지요. 이를 '베를린 봉쇄'라고 합니다. 이때 서방 3국은 서베를린에 있는 시민 약 250만명에게 비행기로 생필품을 전달하며 대항했어요.

그 후 봉쇄는 풀렸으나 베를린은 동서로 완전히 분열됐고 서베를린은 마치 동독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되었지요. 1949년 미국·영국·프랑스가 점령한 곳에는 민주주의 국가인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소련이 점령한 곳에는 공산주의 국가인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세워지며 독일이 분단국가가 되었어요.

이후 동독 사람들은 생활수준이 더 나은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려고 했어요. 젊은 노동자가 자꾸 빠져나가자 동독 정부도 고민이 많았지요. 동독에서는 동서 베를린 사이에 40여㎞나 되는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기로 합니다. 장벽을 쌓은 후엔 허가받은 사람만 브란덴부르크문을 통해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어요. 이 베를린 장벽은 독일 분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동독 주민들의 시위와 무너진 장벽

동독과 서독 관계가 풀리기 시작한 때는 1969년이었어요. 당시 서독 총리 브란트가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는 외교 정책인 '동방 정책'을 발표했어요. 브란트 총리는 동독이나 소련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과 국교를 맺었어요. 또 '동·서독 기본조약'을 맺어 방송이나 스포츠 분야에서 교류하기 시작했어요.

1989년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동·서독 주민들이 벽 위에 올라가 이를 기념하고 있어요.
1989년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동·서독 주민들이 벽 위에 올라가 이를 기념하고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1973년 9월엔 국제연합(UN)에 동·서독이 동시에 가입해 서로 존재를 인정했어요. 1985년 소련에서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돼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유럽에 민주화 바람이 불게 되지요. 그 바람이 동독에도 불어오면서 자유를 갈망하는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점점 더 많이 넘어갔어요. 동독 정부가 국제연합 회원국이 되면서 시민들의 거주 이전 자유와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서독으로의 이주 신청도 허용해야 했죠. 또 소련 고르바초프와 달리 동독 에리히 호네커 정권은 개혁을 거부해 이에 실망해 떠나는 동독 주민이 더욱 많아졌어요.

1989년 상반기에만 이주 신청이 12만5000건을 넘겼다고 해요. 결국 동독 주민들은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시위로 나타냅니다. 1989년 9월 4일 공업 도시 라이프치히에서는 '월요 시위'가 시작돼 시민 1200명이 모였어요. 이후 시위는 매주 월요일마다 이어져 전국으로 번졌지요. 이 시위로 동독 호네커 서기장은 쫓겨났어요. 하지만 시위 열기는 누그러지지 않았습니다. 11월엔 시위대가 100만명대로 늘어났어요.

마침내 11월 9일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 장면이 전 세계에 보도됐어요. 분단의 상징이었던 이 거대한 장벽은 동시에 독일 통일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통일 논의에 속도가 붙었거든요.

◇통일 향한 동독의 변화 도운 서독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이 연방식 통일국가(동독·서독 각각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하나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10단계 통일 방안'을 내놓았어요. 같은 해 12월 18일 콜 총리가 정상회담을 위해 동독 드레스덴을 찾았을 때 동독 주민들이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콜 총리를 환영했어요. 콜 총리는 다음 날 민족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연설을 했고 동독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동·서독 정상회담 이후 통일로 향하는 여정은 더욱 빨라졌어요.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에 시민들의 여행·언론·정보·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지하라고 요구했어요. 동독 한스 모드로(Modrow·1928~) 총리는 자유·평등·비밀·보통선거의 4대 원칙을 바탕으로 한 선거법을 만들었지요. 또 시장경제에 따른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헌법과 형법도 민주적으로 개정했어요. 물론 서독 정부는 동독의 개혁을 돕기 위해 물적·인적 지원을 했고요.

콜은 독일 통일을 위해 통일에 반대하는 주변 국가들도 설득해야 했어요. 특히 소련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어요. 콜 정부는 소련에 2억200만마르크어치 식료품과 생필품을 보내는 등 경제적으로 지원했죠. 또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 동독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해달라고 요구했어요. 소련군 35만명이 복귀하는 데 드는 비용은 서독에서 부담했지요.

이런 준비 과정을 거쳐 1990년 8월 31일 동독과 서독 사이에 통일 조약이 맺어집니다. 그해 10월 3일 독일 통일이 선포되지요. 총성 없는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은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