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추상화의 거장, 빨강·파랑 色 대립으로 캔버스에 긴장감

입력 : 2018.09.22 03:07

유영국의 색채추상 展

추석이 다가옵니다. 이맘때가 되면 일 년 중 하늘이 가장 높푸르고 보름달도 크고 밝게 보이지요. 선선해진 날씨를 느끼기 위해 산에 오르는 사람들도 많아요. '왜 굳이 힘들게 땀을 뻘뻘 흘리며 등산을 하나'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을 거예요.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저 나무 냄새가 좋아서" "운동 삼아 걸으려고"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고" 같은 대답이 나와요. 조금씩 다른 듯하지만 산에 가려고 신발끈을 죄어 묶는 이유는 하나로 모아집니다. 산이 항상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을 우러러봅니다. 세상은 금세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행으로 가득해 변덕스럽지만 자연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요. 변화가 없는 절대적인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아 살고 싶어했던 대표적인 한국의 화가가 유영국(1916~2002)입니다.

유영국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친구들도 있을 거예요. 유영국은 20세기 초 한국 근대미술을 연 화가 중 한 명이에요. 서민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은 박수근, 소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 달항아리를 즐겨 그린 김환기와 같은 시대를 살았어요. 한국 근대미술 애호가 상당수가 김환기와 더불어 유영국을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거장으로 꼽지요. 어떤 그림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다음 달 7일까지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 가면 '유영국의 색채추상'전을 볼 수 있어요.

추상화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겉모습이 아니라 안에 숨어 있는 본질적인 특성을 뽑아내 표현하는 그림이에요. 사물 생김새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린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생생하게 전달하지요.

유영국은 추상화를 그릴 때 우리나라 자연, 특히 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향 경북 울진에서 늘 산을 보며 자랐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산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자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하지요.
작품1 - 〈작품〉, 1962.
작품1 - 〈작품〉, 1962. /국제갤러리, ‘유영국의 색채추상’展
유영국 작품을 처음 마주하면, 화면을 가득 채운 선명한 색채에 몸도 마음도 빨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화가는 자연에서 영감을 받되 그 모습을 일일이 옮겨 그리지 않았어요. 대신 자신이 자연에서 받은 전체적인 느낌을 끌어모아, 색채의 에너지로 바꿔 화폭에 옮겼지요. 작품1을 보세요. 뜨거운 색조와 차가운 색조가 마치 싸우듯 팽팽하게 각자의 기운을 내뿜고 있습니다. 붉음과 푸름이 서로 물러나지 않으려고 맞서고 있는 그림 가운데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회오리처럼 몰려 있어요.
작품2 - 〈작품〉, 1964.
작품2 - 〈작품〉, 1964. /국제갤러리, ‘유영국의 색채추상’展
작품2는 초록색으로 칠해 차분해 보여요.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 숲속 바람결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해가 저물기 직전 마지막 남은 빛줄기 한 가닥이 수직으로 내려와 산꼭대기를 붉게 물들여가듯 강렬한 기운도 있어요. 이런 그림을 감상할 때는 그림 속 사물이 가진 의미를 하나하나 찾기보다, 그림에서 어떤 요소가 인상 깊고 감동을 주는지 마음으로 느끼는 게 좋아요.

유영국은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말했어요. 마음속 눈으로 산을 보았다는 뜻이죠. 동양 고전에 나오는 '호연지기(浩然之氣)'와도 통하지요. 호연지기는 탁 트인 공간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기운을 만끽한다는 뜻이에요. 특히 산꼭대기에 홀로 서면 어떤 것으로부터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와 해방감을 맛볼 수 있어요. 자신이 자연의 한 부분임을 실감할 수 있고요. 중국 철학자 맹자는 호연지기란 자연의 기운을 들이마시는 것뿐 아니라, 자기 내면에 쌓은 덕을 밖으로 내보내는 거라고 했어요. 마음속에 선량한 기운을 계속 키워나가면 그것이 언젠가는 더 크고 강한 힘이 돼 밖으로 드러난다는 뜻이에요.
작품3 - 〈작품〉, 1967.
작품3 -〈작품〉, 1967. /국제갤러리, ‘유영국의 색채추상’展
유영국도 호연지기를 예술로 드러낸 걸지 몰라요. 작품3의 산봉우리들을 보세요. 유영국이 기억하는 산은 빨강, 보라, 주황으로 색을 바꿉니다. 산은 영원히 변치 않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보는 사람 마음 상태에 따라 늘 다른 색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해요.
작품4 -〈Circle-A〉, 1968.
작품4 -〈Circle-A〉, 1968. /국제갤러리, ‘유영국의 색채추상’展

호연지기와 비슷한 감성을 서양에서는 '숭고'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장면을 마주쳤을 때 감당하지 못할 만큼 격한 감동을 받는 것을 뜻해요. 작품4를 볼까요? 붉게 물든 하늘에 태양이 반쯤 얼굴을 내밀다가 마침내 온전한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아니면 반대로 해질 무렵 태양이 서서히 모습을 감추는 순간인지도 모르지요. 일출이든 일몰이든 그 장엄한 광경은 언제 봐도 찬란합니다. 그 감정이 넘쳐 흘러 뭉클함까지 준다면 그때 받은 감동은 숭고하다고 할 수 있어요.

산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한 화가를 떠올리면서 우리도 마음의 눈으로 유영국 작품을 보면 어떨까요?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을 넘어 내 안에 깊이 잠자고 있던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