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 한양 북촌엔 실세 양반, 남촌엔 가난한 선비 살았죠

입력 : 2018.09.19 03:00

청계천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 구분… 권력 얻은 파벌은 궁궐 근처 있었죠
일제강점기 남산 일대 은행 등 생겨 중심지 됐지만 '왜놈마을' 불리기도

서울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신문 1면에 나오고 있어요. 지방 집값이 몇 개월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데 서울, 특히 강남 지역에서는 아파트값이 최고 기록을 갈아 썼다는 뉴스가 나와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강남 집값이 비싼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해요. 우선 기업이 많아 좋은 일자리가 많아요. 이름난 학교와 학원가가 있어 교육 환경도 좋지요. 교통이 편리하고 쇼핑·문화 시설도 많아요. 조선시대에도 한양 안에 강남처럼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었어요. 지금은 한강을 기준으로 강남·강북이 나뉘지만, 그때는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촌'과 '남촌'이 갈라졌어요.

◇한양의 정치·경제 중심지 '북촌'

북촌과 남촌은 조선 말기 역사학자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나와요. 고종 때부터 1910년까지 있었던 일을 순서대로 정리했지요. 고종 이전에 있었던 사건은 정확한 날짜를 적진 않았지만 황현 자신이 들은 얘기들을 기록해놨죠. 이 책에 나온 얘기를 토대로 하면, 조선시대 한양 북촌 어느 으리으리한 기와집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이런 대화를 나눴을 것 같아요.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 한양 북촌엔 실세 양반, 남촌엔 가난한 선비 살았죠
/그림=정서용
"남촌에 가지 말라고 일렀거늘 왜 자꾸 남촌에 가느냐?" "친한 벗이 남촌에 살아서…" "앞으로는 남촌에 사는 벗 말고 이곳 북촌에 사는 벗들하고만 사귀도록 하여라." "왜요?" "다 이유가 있으니 그리하도록 해라."

아버지가 말한 북촌과 남촌은 어디일까요? 또 아버지는 왜 아들에게 남촌 아이들과 놀지 말라고 했을까요?

북촌은 종로와 청계천 북쪽 지역이었어요. 북촌 중에서도 경복궁과 창덕궁 근처가 중심 지역이었죠. 궁궐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왕족이나 벼슬 높은 관리들,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살았지요. 자연스레 여러 관아도 북촌에 몰려 있어 조선 정치·경제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었어요.

남촌은 청계천 남쪽 일대였어요. 특히 남산 기슭이 남촌 중심 지역이었죠. 주로 하급 관리나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가난한 선비들, 몰락한 양반 가문이 모여 살았지요. 엄격한 신분 질서가 있는 조선 사회에서는 북촌과 남촌 중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사회적 위치가 나뉘었어요. 같은 양반이어도 북촌 양반은 자기가 더 높다고 남촌 양반을 얕잡아 봤다고 해요.

◇북촌에는 노론, 남촌에는 소론·남인·북인

하지만 북촌 기와집에 사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촌 아이들과 놀지 말라"고 한 이유가 오로지 돈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조선 중기인 선조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는 선비들이 학파·정치적 입장에 따라 여러 파벌로 갈려 정권을 잡으려고 싸웠어요. 일명 '붕당 정치'라고 하지요. '붕당'은 16세기 조선 선조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선비들이 학파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만든 집단이에요.

붕당 정치를 하는 주요 당파가 바로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이에요. 이들을 통틀어 '사색당파'라고도 해요.

이 중 노론은 18세기 조선 경종 때 권력을 잡아 19세기 후반 철종 때까지 거의 100년 넘게 막강한 세력을 누렸어요. 자연히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권세를 누리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들은 대부분 북촌에 살았지요.

반면 힘이 없는 다른 당파는 남촌에 많이 살았어요. 황현은 매천야록에 "종각 이북 북촌에는 노론이, 종각 남쪽 남촌에는 소론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적었어요. 북촌 사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촌에 가지 말라"고 한 건 경제적인 형편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도 달랐기 때문일지 몰라요.

◇일제강점기에 뒤바뀐 형편

하지만 그 후 북촌과 남촌 운명이 한 번 더 바뀌어요. 조선 정부는 1885년 한양 도성 안에 일본인들이 살 수 있도록 허용했어요. 뒤이어 일본 공사관과 통감부 건물이 남촌에 들어섰어요. 한양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그 주변에 몰려 살기 시작했어요. 오늘날 서울 중구 예장동과 회현동 일대였지요.

일제에 국권을 뺏기면서 일본인들이 사는 동네가 서울 중심이 됐어요. 일본이 세운 관공서와 은행, 회사들이 남촌에 들어섰지요. 물론 이렇게 세운 관공서나 은행은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는 근거지가 되었고요. 오늘날 명동과 충무로에는 포장도로가 생겼고 백화점이 들어서며 화려한 도시 모습을 갖췄답니다. 당시 조선인들은 남촌을 '왜놈들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이에 비해 북촌 일대는 근대 도시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어요. 상권이 무너졌고 조선 정치·경제 중심지로서 명성도 잃고 말았지요.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

남촌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가난한 선비들,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이 주로 살았지요. 이 때문에 '남산골 샌님이 역적 바라듯'이란 말이 생겼어요. 이 속담은 '가난한 사람이 엉뚱한 일을 바라는 상황'에서 써요. 몰락한 양반들이 벼슬길에 오를 길이 없으니 '혹시 역모 사건이 일어나면 그 참에 벼슬자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역적이 생기기만 바란다는 뜻이죠. '샌님'은 '생원님'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지금으로 치면 9급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