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궁궐 떠나 자유롭게 산 화가… 그림 속 신선과 닮았죠

입력 : 2018.09.08 03:07

'조선 최후의 거장 장승업·취화선' 특별展

조선시대 끝자락인 19세기, 고아로 자라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무엇이든 한 번만 스쳐 지나듯 보아도 그림으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천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오원 장승업(1843~1897).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더불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어요. 장승업은 관찰한 것뿐 아니라, 상상한 것을 그리는 데에도 뛰어났어요. 누가 무슨 이야기만 들려주어도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실감 나게 그려냈으니까요.

어찌나 그림에 재치가 있고 생생한 기운이 넘쳐나던지, 입소문을 들은 임금님이 그를 궁궐로 불러들여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장승업은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무엇 하나 거리낌 없이 생활하던 사람이라, 궁궐에서의 안정적인 생활보다는 차라리 거칠어도 자유로운 삶을 좋아했어요. 어느 날 문득 그는 한마디 인사도 없이 궁궐을 나가버립니다.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주제별로 선보이고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이번엔 장승업의 명작들을 선보이고 있어요. 장승업의 화풍을 이어받은 조석진과 안중식의 그림까지 볼 수 있어요. 이 전시는 11월 30일까지 열립니다.

장승업은 평생 혼자 살았기 때문에 그가 말년에 어디서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아요. '장승업이 홀연히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봤다'는 사람들이 있어서인지, 그가 신선이 됐을 거라는 얘기도 내려온답니다.
작품1 - '녹수선경(사슴이 선경을 수업하다)'.
작품1 - '녹수선경(사슴이 선경을 수업하다)'. /DDP, '조선 최후의 거장 장승업·취화선' 특별展

신선은 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초인으로, 평생 아프지도 않고 골치 아픈 세상사에 얽히지도 않으며 늘 산 좋고 물 좋고 먹을 것 풍부한 곳에서 평화롭게 산다고 합니다. 작품1을 보세요. 산에 사는 신선이 소나무 그늘에 앉아 사슴에게 책을 읽히고 있네요. 여기 나온 신선의 얼굴이 장승업과 똑 닮았는지는 모르지만, 혹시 이 그림이 그의 자화상 아닐까요.

그렇다면 장승업의 그림에서 신선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까요? 작품2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중국 송나라 때 시인인 소동파가 지은 '동파지림'에 실린 이야기의 한 장면인데요. 그림 속 노인 세 명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자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이가 얼마인지 모르겠어. 반고(중국 신화에서 천지를 창조한 신)와 어렸을 때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나기는 해"라고 첫 번째 노인이 능청스럽게 말했어요. 그러자 두 번째 노인이 "난 바다가 뽕밭이 될 때마다 나뭇가지 하나씩을 놓아두었더니, 어느덧 그게 큰 집을 가득 채웠어"하고 받아칩니다. 바다가 뽕나무밭으로 변했다는 건 바다와 땅이 뒤바뀔 만큼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지요.

〈왼쪽부터〉작품2 - '삼인문년(세 사람이 나이를 묻다)', 작품3 - '춘남극노인(봄 남극노인)', 작품4 - '노저래안(갈대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왼쪽부터〉작품2 - '삼인문년(세 사람이 나이를 묻다)', 작품3 - '춘남극노인(봄 남극노인)', 작품4 - '노저래안(갈대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DDP, '조선 최후의 거장 장승업·취화선' 특별展

과장이 지나쳐서 허풍같이 들리는 이들의 대화는 세 번째 노인에게서 극에 달합니다. "난 '반도(蟠桃)'를 먹고 그 씨를 쌓았는데, 지금 그 높이가 곤륜산과 같다네." 반도는 3000년마다 한 번 열린다는 신선 세계의 복숭아예요. 곤륜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높은 산으로 신선들이 산다고 알려져 있죠. 그림 속 세 노인은 허풍쟁이가 아니라 신선들이었던 거예요.

수천수만 년을 산다는 신선에 비하면 사람은 고작 100세 안팎 정도 짧은 생을 살아요. 사람 수명을 관리하는 별은 남극성 또는 수성(壽星)이라고 부르는데, 그림 속에선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작품3에서 보듯 이마가 툭 튀어나와 있고 두루마리를 소중히 손에 꼭 쥐고 있는 게 특징이에요. 이 두루마리에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날짜가 전부 적혀 있다고 해요. 그림에서처럼 동자(남자 아이)를 가끔 데리고 다니기도 하는데, 아픈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빌어 남극노인을 감동시키면 동자를 시켜 복숭아를 선물하기도 한대요. 복숭아는 장수를 축복하죠.

노년의 평안을 기원하는 그림도 있어요. 갈대밭에 내려앉은 기러기를 그린 작품4를 보세요. 장승업은 붓에 먹을 짙게 묻혀 기러기의 머리와 날개 깃털을 표현하고, 부드러운 가슴털이 있는 몸통은 물을 많이 타서 묽은 먹으로 그렸어요. 기러기들의 자연스러운 동작에서도 화가의 기량이 한껏 두드러집니다. 요즘에는 '기러기 아빠'라는 말이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내며 그리워하는 가족을 뜻하게 됐지만, 원래 기러기는 화목을 의미해요. 한자로 기러기는 '안(雁)'인데, 편안하다는 '안(安)'과 소리가 같아요. 마찬가지로 갈대는 '노(蘆)'이고, 이는 늙음의 '노(老)'처럼 들려요. 그러니까 갈대밭의 기러기 그림엔 행복한 노년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지요.

장승업의 노년은 평안했을까요? 평생 가족이 없었던 그는 어쩌면 외롭고 쓸쓸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의 예술은 마치 신선처럼 다른 이에게 생명력을 주면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답니다.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