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노벨상 받은 '민주화의 상징'… 소수민족 탄압에는 침묵

입력 : 2018.09.07 03:07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얼마 전 국제사회에 미얀마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취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어요. 최근 유엔이 "미얀마군이 인종 청소를 위해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대량 학살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에요. 난처해진 노벨위원회 측은 "노벨위원회 임무는 상을 받은 후 수상자의 일을 감독하는 것이 아니다. 수상자는 스스로 명성을 지켜야 한다"며 노벨상을 박탈하지 않겠다고 밝혔어요. 애초에 아웅산 수지는 왜 유명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쳐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됐을까요? 그 과정을 알려면 미얀마의 독립부터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알아야 해요.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독재자

미얀마는 한때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어요. 하지만 인도와 국경 침범 문제로 영국과 전쟁을 벌인 이후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지요. 이때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던 사람이 아웅산 장군이에요. 그는 버마독립군을 만들어 일본과 손잡고 영국군과 싸워 영국군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어요. 일본이 철수하고 영국군이 다시 들어오자 독립 협상을 위해 직접 영국 정부와 담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가 민주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암살을 당해요. 독립 영웅의 죽음 앞에 온 미얀마가 슬픔과 혼란에 빠졌어요. 다수인 버마족과 소수민족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정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시간이 계속됐지요. 아웅산 장군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던 네 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에야 혼란이 가라앉았습니다.

네 윈은 나라 이름을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고치고 새 정부를 수립해요. 극도로 폐쇄적인 외교를 펼쳐 냉전 시기에도 국제 분쟁을 겪지 않게 되지요. 하지만 국내 혼란은 더 심해졌습니다. 소수민족들을 억압하고, 불교를 강요하며 다른 종교를 탄압했어요.

네 윈은 미신에 관심이 많아 기이한 화폐 정책을 펼친 것으로도 악명 높아요. 미얀마 화폐 단위는 '차트'인데 그의 75번째 생일을 기념해 '75차트'라는 화폐를 발행하는가 하면, '9'가 행운의 숫자라는 소리를 듣고는 '90차트' 화폐를 만들기도 했어요. 이런 화폐 정책은 미얀마 경제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 갔어요.

◇8888항쟁이 바꾼 아웅산 수지의 삶

이 시기 미얀마 수도 양곤의 한 찻집에선 큰 패싸움이 벌어집니다. 주도자 중 한 명은 처벌 없이 풀려났어요. 아버지가 정부 고위 관리였기 때문이었죠. 미얀마 학생들은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40명 넘는 학생을 붙잡았어요. 그 과정에서 한 학생이 질식사하자 전국적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네 윈은 "국민이 시위에 나선다면 군인들의 총구는 국민을 향할 것이다"라며 위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8년 8월 8일 학생과 스님들이 앞장서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어요. 이른바 '8888항쟁'입니다. 시민들은 물론, 공무원과 군인들까지도 참가했어요. 정부는 네 윈 말대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사상자 3000명이 발생합니다. 시위대 또한 돌과 자전거 바큇살까지 동원해 군대에 맞섰다고 해요. 이 격렬한 시위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아웅산 수지'도 참여했습니다.

미얀마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이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방관했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맞닥뜨리면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명예가 떨어지고 있어요.
미얀마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이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방관했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맞닥뜨리면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명예가 떨어지고 있어요. /AP 연합뉴스

아웅산 수지는 아웅산 장군의 딸입니다. 15세가 되던 해에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고 정치학을 공부했지요. 거기서 만난 영국인과 결혼까지 해 일본 교토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어요.

아웅산 수지의 인생은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미얀마로 돌아왔을 때 겪었던 8888항쟁으로 인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아웅산 수지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아닌 미얀마 연방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나갔어요. 미얀마 국민은 8888항쟁 이후 있었던 총선에서 독립 영웅의 딸이자, 행복한 가정을 뒤로한 채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아웅산 수지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요. NLD는 80% 넘는 의석을 가져갔지요.

그러나 군부 세력은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아웅산 수지를 가택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때부터 아웅산 수지는 2010년까지 22년간 세 차례(전체 15년) 집에 갇혀 살았어요. 그러다 1991년 민주화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당시에도 집에 갇혀 있었기에 남편과 아들이 대신 상을 받았지요. 남편이 죽었을 때에도 장례식에 가지 못했어요. 사실 군부 세력은 아웅산 수지에게 장례식에 가라고 설득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한 번 출국하면 다시는 미얀마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아웅산 수지가 눈물을 머금고 거부한 것이지요.

◇스님들의 샤프론 혁명과 미얀마 정권교체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만족시켜주지 못한 미얀마 정부는 오랫동안 반정부 시위에 시달려야 했어요. 또 서방 국가들의 제재로 경제난을 겪었죠.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인상돼 국민 생활은 어려워졌지요. 2007년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미얀마의 스님들이 국민 수만 명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합니다. 이 시위를 미얀마 스님들이 입는 옷 색깔을 따서 '샤프론 혁명'이라고 불러요. 군부 정권은 또다시 폭력을 사용합니다. 역시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어요. 미얀마를 여행 중이던 외국인이 다치기도 했죠. 군부는 시위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인터넷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결국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미얀마 정부에 특사를 파견해요. 폭력적인 진압은 금지됐고 아웅산 수지의 가택 연금도 풀렸습니다. 하지만 군부 정권은 그녀가 권력을 잡을 수 없도록 헌법을 고칩니다. 직계가족이나 배우자가 외국인인 경우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도록 한 것이에요. 그럼에도 2015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NLD는 대부분의 의석을 가져가고 대통령을 배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아웅산 수지가 오랜 기간의 가택 연금에도 조국의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같은 미얀마 국민인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지켜보고만 있던 것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에도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의 아웅산 수지를 기억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1983년 북한 인민무력부가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을 노리고 아웅산 묘소에 폭탄을 설치, 폭파한 사건이에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늦게 도착해 화를 피했지만 장관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어요. 자국의 독립 영웅 아웅산의 묘소를 폭파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미얀마는 북한과 국교를 끊었습니다.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