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미있는 과학] DNA만 160억 쌍… 밀 게놈 95% 해독에 13년 걸렸죠

입력 : 2018.09.06 03:00

[밀 게놈 지도]
거대하고 복잡한 유전정보 가진 밀… 게놈 지도에 유전자 10만여개 포함
밀가루 소화 방해 유전자도 찾아내… 면 먹으면 배아픈 사람들에 희소식

국수, 파스타, 빵, 과자 등 우리가 흔하게 먹는 음식에는 밀이 쓰이는 경우가 많아요. 삼시 세 끼 중에 한 번은 면 종류를 먹게 되는 날도 허다하죠.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밀은 아주 많은 사람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어요. 그래서 밀을 옥수수, 쌀과 함께 '세계 3대 곡물'로 꼽는답니다. 최근에는 기후변화로 밀을 제대로 재배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는데요. 과학자들이 밀을 이루고 있는 전체 유전자의 비밀을 풀어내면서 걱정이 사라질 듯합니다.

◇밀 게놈 DNA 수는 사람의 5배 이상

지난달 17일 세계적 과학학술지 '사이언스'의 표지를 밀이 장식했어요. 전 세계 68개국 과학자 2400여 명이 모여 13년간 노력한 끝에 밀의 전체 게놈(genome, 유전체)을 95% 이상 해독했기 때문이에요. 게놈은 한 생물이 가진 모든 DNA 서열을 뜻해요. 한 생물에 있는 DNA는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 네 가지 분자가 특정한 순서로 배열돼 있어요. 이 순서에 따라 유전 정보가 암호화돼 있고 이를 DNA 서열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밀의 전체 게놈이 해독됐다는 건 밀이라는 생명체를 만들고 기르는 모든 유전 정보를 알아냈다는 뜻이지요.

[재미있는 과학] DNA만 160억 쌍… 밀 게놈 95% 해독에 13년 걸렸죠
/그래픽=안병현
밀은 전 세계 식량의 20%를 공급할 정도로 중요한 곡물이에요. 밀의 게놈을 파악하면 식량을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2005년부터 국제밀게놈해독컨소시엄(EWGSC)이 만들어져 연구해 왔어요. 하지만 옥수수나 벼에 비해 밀의 게놈 해독은 유독 어려웠어요. 밀이 다른 작물보다 거대하고 복잡한 게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밀 게놈의 DNA 수는 160억 쌍인데요. 이건 옥수수(24억 쌍)나 벼(4억3000만 쌍)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아요. 사람 게놈(30억 쌍)보다도 5배 이상 많은 유전 정보예요.

밀 게놈의 복잡한 구조도 해독을 오래 걸리게 한 이유 중 하나였어요. 밀은 진화하면서 서로 다른 종끼리 교배하며 잡종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반복했는데요, 이때 원래 한 쌍씩 있던 염색체들이 3배로 불어났어요. 그러면서 중복되는 DNA 서열도 많아졌죠. 이런 정보들까지 하나씩 해독하려다 보니 시간이 걸리게 된 거예요.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밀 게놈을 해독하는 게 가능할까'라고 생각하던 과학자도 있을 정도로 까다로운 작업이었는데 마침내 결실을 맺었습니다.

◇기후변화에도 끄떡없는 밀 품종 나올까

새로 완성한 밀 게놈 지도에는 밀 염색체 42개와 유전자 10만7891개, 분자 표지(molecular markers) 470만 개 등이 들어 있어요. 여기서 염색체는 유전자들이 뭉쳐져 포장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사람의 경우는 몸의 세포마다 23쌍의 염색체(총 46개)가 들어 있어요. 염색체는 DNA 서열로 이뤄져 있고, 여기에 유전자들이 기록돼 있답니다. 분자 표지는 생물의 특성, 즉 크기, 색깔이나 질병 저항성 등에 관련된 유전자가 어떤 것인지 표시해둔 것이에요. 이 정보들은 밀을 기르거나, 더 좋은 품종을 만드는 데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어요.

실제로 최근 십여 년간 지구온난화는 밀을 기르는 농민들을 위협해 왔어요. 원래 밀은 연간 강수량이 762㎜ 이하로 건조하고 서늘한 지역에서 자라는 작물이에요. 고온에도 매우 약하고 비가 많이 내려도 곤란해지는 거죠.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북유럽과 아시아, 캐나다 등에 폭염이 지속되면서 밀 경작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어요. 날씨가 달라지면서 병충해도 심해졌고요.

이번에 해독된 밀 게놈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가 될 거예요. 10만 개 넘는 유전자를 알게 됐고 또 일부는 기능까지 파악한 데다, 분자 표지도 470만 개나 찾았으니까요. 이 정보를 이용하면, 생산량이 많거나 특정 병충해에 잘 견디는 등 원하는 특징만 가진 밀을 만들 수도 있어요. 전통적으로 품종을 개량하던 육종법은 물론,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로 불필요한 유전자를 제거하는 방법 등을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에요.

◇밀 알레르기 없이 빵 즐길 수도

밀 게놈 해독은 밀가루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던 사람들에게도 좋은 소식이에요. 소화를 방해하거나 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유전자도 상세하게 밝혀졌거든요. 이 정보를 이용하면 밀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는 밀을 만들어낼 수도 있어요.

밀에는 글리아딘(gliadin)과 글루테닌(glutenin)이라는 단백질이 풍부해요. 밀가루를 반죽하는 과정에서 두 단백질이 결합하면 글루텐(gluten)이라는 단백질이 됩니다. 이 단백질이 가진 구조 덕분에 탄력이 생기고, 이것이 면발을 길게 늘이거나 빵을 부풀게 하는 역할을 해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글루텐을 소화하지 못하는 병(셀리악병)에 걸리기도 해요. 증상이 심하면 과민성 쇼크가 오거나 알레르기 현상도 나타나죠. 글루텐이 천식을 유발한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이번 연구에서는 이런 증상과 연결될 것 같은 유전자를 828개 찾아내 분석했어요. 그 결과 글루텐 소화를 방해하는 유전자와 과민성 쇼크를 일으키는 유전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찾아냈어요. 밀의 껍질과 눈 부분을 빼고 전분이 있는 '배젖'에서 해당 유전자들이 활성화되고 있었던 거예요. 또 밀을 기르는 온도에 따라 이 유전자들의 활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새로 알아냈어요. 천식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유전자도 꼭 집어내게 됐고요. 이 사실들을 이용하면 밀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품종을 개발할 수 있을 거예요.


박태진 과학 칼럼니스트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