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곡선과 선명한 色의 조화… 자유로운 '나나' 만나보세요

입력 : 2018.08.18 03:07

니키 드 생팔-마즈다 컬렉션展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가면서 가족과 배우자, 친구 등 여러 사람과 관계로 묶이게 됩니다. 그중에는 편안하고 좋은 사람도 있지만,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어요. 좋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즐겁고 명랑해지겠지만, 힘든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분노가 쌓여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할 프랑스 미술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Phalle, 1930-2002)의 작품에는 그녀가 살면서 겪었던 여러 사람과의 경험이 담겨 있어요. 니키는 가까운 사람 때문에 크게 고통받기도 했고, 또 반대로 예술가로서 아낌없는 응원을 듬뿍 받기도 했습니다. 니키는 풍만한 체형의 여성을 모델로 한 '나나' 연작을 발표했어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니키 드 생팔의 작품을 오는 9월 25일까지 전시하고 있는데요. 일본에 살면서 니키 미술관을 세우기까지 할 정도로 니키의 열광적 지지자였던 마쓰다 요코의 대형 수집품들과 그림 편지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요코는 니키보다 한 살 어린 일본의 사업가인데 마흔아홉에 니키의 작품을 처음 본 순간 한 줄기 빛을 받은 것처럼 인생이 확 달라졌다고 해요. 니키와는 평생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구로 지냈답니다.

작품1을 보세요. 수영복을 입고 두 팔을 벌린 채 춤을 추는 여자 이름도 나나입니다. 1980년 요코는 무심코 일본 도쿄에 있는 갤러리에 들어갔다가 니키의 판화들을 보고 강렬함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지금까지 답답했던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고 수십 년간 어깨를 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이 사라진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무얼 만난 걸까?' 요코는 다음 날 다시 갤러리로 갔고 춤추는 나나를 보았습니다. 나나는 거침없이 자유롭고, 연약하거나 주눅 드는 일도 없으며, 즐거운 상상력으로 충만한 인물이었어요. 요코에게 나나는 마치 자유의 여신 같은 존재였습니다.

작품1 - ‘뛰어오르는 나나’, 1970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니키 드 생팔-마즈다 컬렉션’展
작품1 - ‘뛰어오르는 나나’, 1970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니키 드 생팔-마즈다 컬렉션’展

니키가 '나나'를 만들게 된 계기는 친구인 클라리스의 임신이었어요. 작품2는 클라리스의 딸 이름을 제목으로 붙여놓았지만, 역시 나나입니다. 니키는 수많은 나나 작품에 아는 여자 이름을 붙여주었거든요. 조각상에서 보듯 임신한 클라리스는 엉덩이도 크고 배도 불룩했는데, 니키는 그 모습에서 편안하고 포동포동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거예요. 패션 잡지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었던 니키는 평소에 보던 잡지 표지의 모델들에게서는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건강하고 강력하게 타오르는 생명력을 클라리스에게서 보았습니다. 어쩌면 배 속에 있는 새 생명체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우람하고 풍부한 몸의 곡선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후 니키의 작품은 판화부터 조각상에 이르기까지 전부 곡선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뾰족하고 날카롭고 부러질 것 같은 직선이 니키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어요. 마치 살아있는 듯 둥글둥글하고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은 효과를 내는 곡선은 니키 작품의 특징이에요. 곡선과 더불어 선명한 색들로 장식된 색색 작품들은 마치 장난감 놀이동산에 온 것같이 보는 이들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어 줍니다.

②작품2 - ‘그웬돌린’, 1990년(1966년 첫 제작). ③작품3 - ‘머리에 TV를 얹은 커플’, 1978년. ④작품4 - ‘부처’, 1999년.
②작품2 - ‘그웬돌린’, 1990년(1966년 첫 제작). ③작품3 - ‘머리에 TV를 얹은 커플’, 1978년. ④작품4 - ‘부처’, 1999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니키 드 생팔-마즈다 컬렉션’展

니키는 움직이는 조각을 만드는 장 팅겔리와 결혼해 함께 작업하기도 하고 그에게서 조언을 얻기도 하며 결혼 후 더욱 활발히 활동하게 됩니다. 작품3은 남편과 아내가 등을 맞대고 반씩 몸을 나누어 가진 남녀 조각상입니다. 앞에서는 남편 모습이 보이고, 뒤로 가면 아내 모습이 보여요. 흥미로운 것은 머리 위에 놓인 TV예요. 두 사람은 결코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는 상태이지만 자기 머리에 얹은 TV 화면으로 상대방 얼굴을 비추고 있답니다.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듯 상대가 뭘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상대방 모습은 실제와는 다르니 늘 얼굴을 마주하라는 메시지일까요.

1998년 10월 니키는 요코의 초대로 처음 일본을 방문했어요. 그때 일본 교토의 한 사원에서 부처상을 보게 되고, 그것에서 영감을 받아 요코에게 바치는 거대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작품4를 보세요. 높이 3m가 넘는 부처상에 색유리가 수도 없이 많이 쓰였어요. 파랑, 노랑, 초록, 보라, 금, 은 등 화려한 색채로 이루어진 부처는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납니다. 눈이 양옆으로 달리지 않고 위아래로 달린 이 부처는 어찌 보면 일본의 장난스러운 몬스터들을 닮은 것 같기도 해요. 일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니키의 색채가 어우러진 멋진 작품입니다. 니키는 이 작품을 전하면서 요코에게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는 불교식 인사를 했다고 해요. 두 사람은 니키의 나나 작품처럼 자유롭고 강인하게 살았던 실제 '나나들'이었습니다.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