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명천 동풍신, 광주 윤형숙… '제2의 유관순' 곳곳에 있었죠

입력 : 2018.08.15 03:00

[우리나라 여성 독립운동가]
광주 만세운동 이끌었던 윤형숙 열사… 동풍신 열사는 아버지 대신 독립 외쳐
최근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 찾아내… 배화·수피아·기전 여학교 학생 포함

올해는 광복 제73주년이에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최근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을 새로 찾아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이들 중 26명이 오는 광복절에 1차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 이은숙 여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의사를 숨겨줬다가 고문을 당한 김아기 여사, 독립운동가 이규풍·이규갑 형제의 어머니 박안라 여사, 만세 시위를 벌여 투옥됐던 배화여학교·수피아여학교·기전여학교 학생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여성들이 포함됐어요.

여성 독립운동가 하면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열사가 가장 먼저 떠오를 거예요. 독립운동에 젊음을 바친 여성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유관순 열사와 닮은 활동으로 '제2의 유관순'이라 불리는 인물들도 있지요. 그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어떻게 독립운동을 펼쳤을까요?

◇"南에는 유관순, 北에는 동풍신"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뒤로 지금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 만세의 함성이 들끓고 있습니다. 우리도 독립 만세를 외칩시다!"

[뉴스 속의 한국사] 명천 동풍신, 광주 윤형숙… '제2의 유관순' 곳곳에 있었죠
/그림=정서용
1919년 3월 14일 오전 11시, 함경북도 명천군 하기면 화대동에 위와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어느새 5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며 화대 장터에 모였다가 이 지역을 통제하는 헌병들이 모여 있는 부대인 화대헌병분견소 앞으로 향했지요.

사람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거듭 외치자 분견소에 있던 일본 헌병들이 나와 사람들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댔어요. 헌병분견소 앞에 모인 사람들 중 5명이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어요. 이 소식을 듣게 된 박승룡, 김성련 등 몇몇 인물들은 이튿날 일본 헌병들의 만행에 항의하는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명천군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1919년 3월 15일, 이들이 이끄는 군중 5000여 명이 화대 장터에 모여 만세 운동을 벌였어요. 이들 중에는 병으로 오래 자리에 누워 있던 동민수라는 인물도 있었어요. 그는 일제의 만행에 동포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식에 죽음을 각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 운동에 참여했어요. 그러나 만세 운동 중 일본 기마 헌병과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해 목숨을 잃고 말았지요.

이 소식을 들은 동민수의 둘째 딸 동풍신은 현장으로 달려와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통곡했어요. 동풍신은 이내 슬픔을 뿌리치고 일어나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동풍신의 의연함에 군중은 크게 감동해 다시 힘을 모아 만세 운동을 펼쳐나갔습니다.

그러나 동풍신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됐어요. 그 후 함흥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동풍신은 "내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것은 만세를 부르다 총에 맞아 숨진 아버지를 대신해서이다"라고 당당히 주장했다고 해요. 동풍신은 함흥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 형을 받은 뒤 경성법원에서 2심을 받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일제의 고문을 받다가 건강 악화로 1921년에 열일곱 살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당당하게 독립 만세를 부른 모습, 옥중에서 꽃다운 나이에 순국한 상황 등이 유관순 열사와 무척 닮았어요. 그래서 "남(南)에는 유관순, 북(北)에는 동풍신"이라며 두 열사를 찬양하는 말이 생겼습니다.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

'남도의 유관순'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윤형숙 열사도 3·1운동 당시 만세 운동에 앞장섰던 여성 독립운동가예요. 1900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난 윤형숙 열사는 열여덟 살에 광주 지역 최초의 여성 중등교육기관인 수피아여학교에 진학했어요.

윤 열사는 리더십이 강해 반장을 도맡으며 학교에서 민족의식을 키워갔어요. 그러다 2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어요. 국내 곳곳에서 항일운동의 바람이 거세지자 광주에서도 3월 10일에 만세 운동이 일어났지요. 광주·전남 지방에서 만세 운동은 이날 시위를 기점으로 퍼졌습니다.

당시 윤형숙 열사는 학생들을 비롯해 군중 1000여 명을 이끌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어요. 일제는 기마 헌병을 투입해 총칼을 휘두르며 만세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윤형숙 열사가 태극기를 든 한쪽 팔이 잘리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어요. 하지만 윤 열사는 반대편 손으로 다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만세를 불렀고 결국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했습니다. 함께 시위에 나선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 20여 명도 잡혀갔어요.

그 후 윤 열사는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잡혀가 옥살이를 해야 했죠. 감옥에 있는 동안 고문으로 오른쪽 눈이 실명되는 고통도 겪어야 했어요.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고향 여수의 기독교학교에서 일하는 등 학생 교육에 힘쓰다 광복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윤 열사는 또 한 번 비극을 맞습니다. 그해 9월 기독교 전도사라는 이유로 북한 인민군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해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윤 열사의 삶은 사후 54년 만에 다시 조명돼 2004년 정부는 윤 열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