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 주의 책] 빨강은 생명, 자주는 특권… 스물네 가지 색 이야기

입력 : 2018.08.10 03:04

'색깔의 역사'

"버밀리언은 날카로움을 지닌 빨강이다, 빛나는 강철처럼."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빨강인 '버밀리언'을 이렇게 묘사했어요. 눈부신 주홍색은 진사라는 광물을 으깬 조각이 최초 원료였지요. 그러나 이 광물엔 수은과 유황이 들어 있었어요. 수은 광산에서 강제 노동을 한 고대 로마의 죄수들은 2년을 못 버티고 죽어갔지요. 그럼에도 대승을 거둔 장군이나 용케 살아남은 검투사들은 행진할 때 버밀리언으로 몸과 얼굴을 칠했어요. 중국의 황제는 버밀리언 잉크를 만들어 공식 문서에 썼고요. 피와 생명을 뜻한 빨강은 고대 중국에서 꼭 필요한 색이었기 때문이지요.

책 속 일러스트
/노란돼지

이 세상에 색깔이 없다면? 색깔에 얽힌 알록달록한 뒷이야기를 파헤친 '색깔의 역사'(노란돼지)는 그야말로 색깔의 역사로 여행을 떠나는 '색깔 사전'이에요. 오래전 중국에선 황제와 황후만 이 색으로 된 옷을 입을 수 있었던 노랑부터 용기와 희생, 때론 행복과 기쁨을 상징하는 빨강, 자연계에서 가장 찾아보기 힘든 색이어서 오랫동안 왕족과 특권을 상징했던 자주, 바다와 하늘 색인 파랑, 자연과 가장 가까운 초록까지 색깔이 품고 있는 오묘한 아름다움으로 우릴 성큼 이끌지요.

브뤼헐, 렘브란트, 윌리엄 터너 같은 화가들이 즐겨 썼던 '갬보지'는 캄보디아라는 나라 이름에서 왔어요. 한때 캄보디아 이름이 캄보자였거든요. 따뜻한 황금빛을 띠는 갬보지는 태국의 가르시니아 나무에서 얻은 색. 1603년 네덜란드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카롤루스 크루시우스는 중국에서 실려 온 갬보지를 얻어 잠깐 류머티즘, 괴혈병을 치료하는 데 썼어요. 많이 쓰면 생명을 위협하고, 적게 써도 배변 활동이 활발해진다는 단점이 있었거든요. 19세기 런던의 페인트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갬보지를 다루는 날이면 매시간 화장실에 가야 했어요.

여행을 좋아해 70여 나라를 둘러봤다는 글쓴이는 이 밖에도 선인장에 붙어사는 연지벌레 14만 마리를 으깨어 만든 강렬한 진홍색 '코치닐', 가난한 사람들이 싼값에 즐겨 썼던 자주 '오칠', 이집트 미라를 갈아서 만든 '머미 브라운', 청사진을 만드는 데 쓰는 '프러시안 블루', 미 자유의 여신상을 보드랍게 감싸고 있는 초록인 '버디그리스' 등 우리 삶에서 떼놓을 수 없는 스물네 가지 색깔을 촘촘히 펼쳐놔요. 보기만 해도 아찔한 색 하나를 골라 꽉 움켜쥐었더니 그에 딸린 역사와 시대, 장소가 고구마 줄기처럼 알차게 달려 나오는 책이라 할 수 있지요.


김경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