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신변 불안했던 고종… 궁궐 떠나 러 공사관에 1년간 피신

입력 : 2018.08.08 03:00

[아관파천(1896)]
명성황후 시해되자 위협 느껴 두 번 시도 끝에 피신 성공했죠
'대한제국' 천명하고 황제 올랐지만 결국 국권 잃고 일제 식민지 됐어요

문화재청이 8월 한 달간 일반인에게 시범 개방하는 특별한 길이 관심을 끌고 있어요. 서울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옛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고종의 길'이에요. 대한제국 시기에 미국 공사관이 제작한 정동 지도에는 이 길을 '왕의 길(King's Road)'로 표시했어요. 1896년 고종이 거처를 옮기며 사용했던 이 길은 왕의 당당한 행차에 사용된 길이 아니라 난리를 피해 몸을 숨기며 사용했던 좁은 길로, 안타까운 우리 근대사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낸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아관파천이었고요.

◇명성황후 죽자 불안에 떨던 고종

1875년 일본군은 서양식 전함 '운요호'를 앞세워 강화도 초지진과 인천 영종도를 침략했어요. 일본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오히려 조선에 물으며 일본과 수교통상 할 것을 강요했지요. 조선은 일본의 강요에 못 이겨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부산항을 열어 문호를 개방했고요.

[뉴스 속의 한국사] 신변 불안했던 고종… 궁궐 떠나 러 공사관에 1년간 피신
/그림=정서용
그 뒤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을 무대로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며 점점 조선을 침략하려는 야욕을 드러냈지요. 그러자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이를 방패막이 삼아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 했어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은 명성황후가 머물던 궁궐에 자객을 보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짓을 저질렀지요. 이를 1895년 을미년에 일어난 사건이라 을미사변이라 불러요.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불안과 공포에 떨며 지냈어요. 친미·친러파 관리와 군인들은 궁궐에서 친일파 세력들에게 포위돼 있는 고종을 궁 밖으로 나오게 해 새 정권을 세우려는 계획을 품게 됐지요. 바로 '춘생문 사건'이에요.

◇고종을 궁궐에서 탈출시켜라

1895년 11월 28일 새벽, 친위대 소속 중대장 남만리·이규홍 등은 자기들 뜻을 따르는 군인들을 이끌고 안국동을 거쳐 경복궁 동쪽에 있는 건춘문을 통해 궁궐로 들어가려 했어요. 그러나 미리 건춘문을 열어 놓기로 약속했던 친위대 제2대대장 이진호가 문을 열어 놓지 않았어요.

그러자 고종을 궁궐에서 빼내오려던 군인들은 삼청동으로 올라가 춘생문에 이르러 담을 넘어 궁궐에 들어가려 했어요. 춘생문은 경복궁 후원으로 들어가는 동북쪽 출입문으로 고종이 지내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문이었지요.

하지만 이미 그곳엔 친위대 숙위병들이 잠복 중이었어요. 이진호가 배신해 미리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에게 밀고했고, 어윤중이 군사들을 움직여 궁궐에 들어오려는 무리를 막게 한 것이에요. 실패로 돌아간 이 일을 춘생문 사건이라 부르는데, 당시 관련된 자들은 처벌받거나 처벌을 피해 도망을 다녀야 했지요.

춘생문 사건이 일어난 지 채 3개월이 지나지 않은 1896년 2월 11일 다시 고종을 궁궐 밖으로 피신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것이 '아관파천'입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성공

1895년 12월 30일 친일 김홍집 내각은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사용할 것과 성년 남자들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공포했어요. 이에 반발한 국민은 의병을 일으켜 친일 내각에 대항했지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수도 서울에 주둔하던 친위대 소속 병사들까지 서울을 비우고 지방에 내려가게 됐고, 이 틈을 이용해 춘생문 사건을 계획했던 이범진을 중심으로 이완용·이운용과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가 다시 고종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킬 계획을 세웠어요.

그들은 궁녀 김씨와 엄상궁을 통해 고종에게 대원군과 친일 세력이 고종의 폐위를 모의하고 있으니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설득했고 고종은 그들의 뜻을 따르기로 했어요.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비밀리에 궁녀의 가마에 타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어요. 이를 아관파천이라 하는데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을 뜻하고, 파천(播遷)은 임금이 거처를 옮겼다는 뜻이에요. 더위가 잠잠해지면 '고종의 길'을 따라 걸으며 당시 고종의 심정을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요?


[아관파천 후 고종과 조선의 운명]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그곳에서 약 1년간 생활했어요. 조선 조정에는 친일 내각이 물러나고 친러·친미파 인물 중심으로 새로 내각이 구성돼 잠시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지요.

고종은 러시아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와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했어요. 그러나 얼마 뒤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고 통감부를 두어 대한제국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1910년 강제로 한·일 병합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을 일제의 식민지로 삼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