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선비들 피서·풍류 담은 그림… 세밀한 묘사 보는 재미

입력 : 2018.07.28 03:07

'여민동락, 조선의 연회와 놀이'展

요즘엔 피서라고 하면 집 떠나 여행 가는 것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요. 하지만 원래 피서란 더위를 잊기 위한 여러 방법의 휴식을 뜻해요. 옛사람들은 어떻게 더위를 피했을까요? 너무 더워 글을 읽고 쓰기 힘든 날이면 조선 선비들은 잠시 책을 덮어두고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며 몸을 식혔다고 합니다. 마음 맞는 선비들끼리 함께 한가로이 바둑을 두거나 시를 읊는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는데요. 우아한 취미 생활을 함께한 후에는 기록 삼아 그림을 그려두곤 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은 피서를 위해서뿐 아니라 축하나 위로를 할 때, 새로운 이를 맞이하거나 헤어짐을 아쉬워할 때 등 다양한 계기로 모임을 갖곤 해요. 이런 모임을 연회라 하는데, 조선시대 연회는 음식과 춤이 있는 작은 축제 역할을 했죠. 시와 그림을 뽐내는 풍류의 장이 되기도 했고요.

고려대학교박물관에서는 오는 8월 11일까지 조선의 연회와 놀이 모임들을 기록한 그림을 전시하고 있어요. 미니어처 인형처럼 작은 인물들이 공연을 하거나 행사를 준비하는 장면들이 많아서, 세밀한 묘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답니다. 전시 제목인 여민동락(與民同樂)은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한다'는 뜻이에요.

작품1 - ‘남지기로회도’ 부분, 19세기 중엽 이후.
작품1 - ‘남지기로회도’ 부분, 19세기 중엽 이후. /고려대학교박물관 ‘여민동락, 조선의 연회와 놀이’展

작품1은 연꽃이 핀 연못을 앞에 두고 꽃구경을 하며 식사하는 어르신들의 모임이에요. 연꽃이 활짝 핀 것을 보니 계절은 여름이네요. 어르신들의 모임 가운데 전통이 가장 오래됐고 영예롭게 여겨진 모임으로 기로회(耆老會)가 있었어요. 이 모임은 나중에는 점차 일반 노인회처럼 변해갔지만 원래는 아주 높은 자리에 있었던 분들, 즉 정2품 자리를 맡았던 70세 이상 문과 출신 관원들만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 중앙의 연회장에는 기로회 어르신 열두 명이 둘러앉아 있어요. 왼편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온 아들들이 보이고, 오른편에는 시녀들이 술과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쁘군요. 그림 아래쪽으로는 멀리 있는 숭례문과 성곽의 일부가 자그맣게 그려져 있습니다.

작품2 - ‘선전관회연도’ 부분, 1789년.
작품2 - ‘선전관회연도’ 부분, 1789년.

조용히 연꽃 구경하는 기로회 연회와는 대조적으로 작품2는 무과 출신 관원들이 군악대의 웅장한 연주를 들으며 연회를 하고 있어요. 연회장으로 꾸민 천막 안에는 관복 차림의 무관들이 앉아 각자 앞에 차려진 상의 음식을 들고 있습니다. 한강에는 배가 떠 있고, 그 위에 연주자 여섯 명이 서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네요. 이들은 주로 임금이 나들이하실 때 군악을 울리는 의례를 맡았어요. 천막 밖에도 군악대 여섯 명이 붉은색과 노란색 나팔을 불거나 징과 북을 치고 있어요. 연주자들은 보통 여섯 명으로 이루어져 화음을 만들어냅니다. 조선시대에는 음악의 화음처럼 조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음악은 각종 궁중 의례에 필수적이었습니다. 물론 서민들의 삶에서도 음악은 흥을 돋우는 원동력이었어요.

작품3은 김준근이 그린 풍속도 중에서 '오음육률하고'인데 이 그림에서도 악사 여섯 명이 타악기와 관악기, 현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음육률(五音六律)이란 다섯 소리와 여섯 가락이라는 뜻이에요. 소리의 높낮이와 가늘고 굵음, 박자의 길고 짧음이 잘 어우러지는 상태를 말해요. 김준근의 풍속도는 19세기 말 서양인들의 배가 부산·원산·인천 등 개항지에 드나들게 되자 외국인에게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할 목적으로 제작됐어요. 김준근은 그림 속 인물이 뭘 하고 있는지 설명하듯 묘사하기 위해 일부러 복잡한 배경은 그리지 않았어요.

(왼쪽 그림)작품3 - 김준근, ‘기산풍속도 스왈른본’ 중 ‘오음육률하고’, 1890년대. (오른쪽 그림)작품4 - 이한철, ‘세시풍속도’ 제5폭 부분, 19세기.
(왼쪽 그림)작품3 - 김준근, ‘기산풍속도 스왈른본’ 중 ‘오음육률하고’, 1890년대. (오른쪽 그림)작품4 - 이한철, ‘세시풍속도’ 제5폭 부분, 19세기.

그러나 일반적으로 풍속도에는 계절감이 넘치는 풍경이 배경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품4의 세시풍속도가 가장 좋은 예이지요. 봄철 모심기, 소 몰며 밭 갈기, 김매기, 가을철 추수하기 등 농촌에서 제때 해야 할 일을 그린 그림을 세시풍속도라고 해요. 세시풍속도는 주로 8폭이나 12폭짜리 병풍으로 만들어져요. 봄부터 겨울까지 혹은 1월부터 12월까지, 마치 달력 그림처럼 매달 분위기에 맞게 달라지는 농촌의 모습을 펼쳐 보여줍니다.

농사일이 아무리 바빠도 온종일 일만 할 수는 없지요. 그림 속에서도 소매와 바짓단을 걷어 올린 채 허리를 굽혀 일하는 농부들 앞쪽으로 흥겨운 농악대가 보입니다. 꽹과리와 장구, 소고를 가지고 경쾌하게 춤을 추며 연주하는 농악대 소리에 모두 덩실덩실 어깨춤이 납니다. 덕분에 힘겨운 농사일도 신나게 끝마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선비든 농민이든 틈틈이 음악과 놀이로 흥을 돋우며 살았어요.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새 단어,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