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튀니지서 시작한 민주화 혁명… 이집트·리비아로 퍼졌죠

입력 : 2018.07.27 03:00

[아랍의 봄]
시위 확산에 소셜미디어 큰 역할… 예멘 포함 아랍 문화권 뒤흔들었죠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최근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국민에게 특별세금을 걷기로 하는 법안이 통과됐다고 해요. 하루에 200우간다 실링(약 50원) 정도 세금이 붙는다고 합니다. 이 정책은 30년 넘게 집권 중인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이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법안을 추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랍의 봄'을 들여다보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어요.

아랍의 봄은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시작돼 북아프리카와 중동 등 아랍 문화권 국가들을 휩쓴 반정부 시위를 의미해요. 아랍 혁명이라고도 하지요. 그 중 튀니지, 이집트, 예멘에서의 시위는 정권을 바꾸는 데까지 이르렀어요. 이 과정에서 국민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목소리를 냈어요. 단체를 만들고 정보를 공유하는 데 소셜미디어가 큰 역할을 했지요.

◇튀니지에서 시작한 재스민 혁명

튀니지에서는 왜 이러한 시위가 시작됐을까요? 튀니지는 아프리카나 아랍 문화권 국가 중에서는 높은 경제 수준을 가지고 있어요. 고대 로마 시대에도 '빵 바구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을 만큼 식량 생산이 풍부했답니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번갈아 경험했던 튀니지는 2010년 벤 알리 대통령이 있었어요. 그전의 종신 대통령이었던 부르기바가 쇠약해지자 총리였던 벤 알리가 '대통령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 총리가 대신한다'는 규정을 들어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지요. 처음에는 바뀐 정권에 기대를 품은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벤 알리 자신도 죽을 때까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헌법을 바꾸고 정부가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자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기 시작했지요.

2011년 2월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자 이집트 국민 수천 명이 광장에 모였어요.
2011년 2월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자 이집트 국민 수천 명이 광장에 모였어요. 이들은 역사적인 순간을 휴대폰으로 찍어 소셜 미디어에 공유했답니다. /AFP 연합뉴스
평범한 26세 청년이었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부패한 경찰이 노점상을 단속하는 데 저항하며 분신을 하게 돼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서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이는 모습이 충격적이었죠. 이를 그의 사촌 동생이 촬영해 소셜미디어에 올리면서 전 세계가 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후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고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가 생기기도 했어요. 결국 벤 알리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고 새로운 정부가 만들어졌습니다. 아랍권에서 쿠데타가 아닌 국민의 봉기로 정권이 바뀐 것은 처음이었어요. 이 사건을 튀니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인 재스민의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이라고 부른답니다.

◇우리는 모두 칼리드 사이드입니다

재스민 혁명 소식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시시각각 다른 나라에 전해졌어요.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던 가까운 국가들에서도 국민이 뜻을 모으면 정부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는 전쟁 영웅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30년 가까이 대통령을 하고 있었지요. 무바라크 정부는 비상사태법을 통해 국민을 통제하고 있었어요. 경찰의 고문, 언론 검열 등으로 민주주의를 원하는 많은 국민이 탄압받았지요.

이런 상황에서 한 소셜미디어에 '우리는 모두 칼리드 사이드입니다(We Are All Khaled Said)'라는 페이지가 만들어졌어요. 청년 사업가였던 칼리드 사이드는 마약 담당 경찰관이 마약 밀매를 하고 있음을 소셜미디어에 알리다 경찰의 폭행으로 사망했지요. 분노의 금요일이라 불리는 날, 이집트 사람 수천 명이 거리를 에워쌌고 그 수는 금세 수백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무바라크 정부는 인터넷과 이동 통신 서비스를 중단시켜 버렸어요.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람이 모이는 걸 막으려 한 거예요. 하지만 분노한 국민은 계속 저항했지요. 결국 무바라크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42년 독재의 종말, 리비아의 카다피

리비아도 혁명의 물결을 피해갈 수는 없었죠. 당시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는 무아마르 카다피였는데요, 28세에 쿠데타를 통해 최고지도자가 되었어요. 초기에는 유전을 국유화하고 이익을 국민에게 돌려주거나 유가를 인상해 리비아 경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의 사진이 불타고 있어요.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의 사진이 불타고 있어요. /AFP 연합뉴스
카다피의 독재는 42년이나 이어져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지요. 재스민 혁명 소식이 퍼지자 리비아 사람들은 긴 독재를 끝내기 위한 시위를 시작했어요. 시위대가 리비아 주요 도시를 장악하면서 사람들은 이제 카다피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카다피는 내전을 선포하고 군대를 이용해 시위대를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여러 국가가 시위대를 지원했지요. 결국 카다피는 수도를 빼앗기고 고향 땅 근처에서 도피 생활을 하다 시민군에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아직 아랍에 봄은 오지 않아

혁명에 성공한 국가들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요? 한때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던 리비아는 혁명을 겪으며 많은 사람이 희생됐어요. 혁명 이후에도 이슬람주의파와 세속주의파로 나뉘어 다시 내전을 겪습니다. 아직도 리비아는 대한민국 정부가 지정한 여행 금지 국가입니다.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난 이후 권력을 잡은 군대와 시위대 간 충돌이 이어졌어요. 간신히 정부가 세워진 이후에도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지요. 지난 16일 이집트에선 팔로어 5000명 이상인 소셜미디어 계정은 언론으로 간주해 정부가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됐어요. 이미 수많은 언론인이 수감돼 있고 주요 언론은 정부를 옹호하고 있는 이집트에서 소셜미디어까지 정부가 규제하면 자유가 심각하게 억압당할 것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어요.

튀니지에서는 혁명 이후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졌어요.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근거로 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와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된 헌법이라는 평가를 받아 기대가 컸지요. 튀니지의 민주화 운동 기구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답니다. 하지만 튀니지는 높은 실업률 등으로 아직도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어요. 특히 정부를 비판하며 분신하는 경우가 가끔 생겨 많은 사람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안영우 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