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왕 있어도 의회가 통치'… 英, 무혈혁명 통해 이뤄냈어요
입력 : 2018.07.20 03:00
[영국 의원내각제의 역사]
존왕의 실정을 비판했던 귀족들, 시민의 자유 위한 '대헌장'요구했죠
세계적으로 젊은 리더십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43세에, 뉴질랜드 저신다 아던 총리는 37세에, 오스트리아 제바스티안 쿠르츠 총리는 31세에 취임하는 등 각국 정상들의 평균 나이가 낮아지고 있어요. 스페인·아이슬란드·프랑스·아일랜드·벨기에·폴란드 같은 나라도 30~40대 지도자를 두고 있죠.
지도자가 젊은 유럽 국가 상당수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요. 간접선거로 총리를 선출하는 제도 안에서 젊은 지도자가 뽑힐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지요. 의원내각제에서는 다수 의석을 차지한 당의 당수가 총리로 선출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당에서 밀어주는 젊은 인사들이 정권을 주도할 기회를 더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소통을 중시하는 젊은 지도자 인기가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의원내각제가 생소할 수도 있겠는데요. 의원내각제가 어떤 제도인지, 또 의원내각제 종주국인 영국의 의회 제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봅시다.
◇영국 헌법 정신 대표하는 '대헌장'
의원내각제는 영국 의회가 군주권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18세기쯤 완성됐어요. 보통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국가는 의원내각제를 선호하는데요, 대통령제처럼 행정권을 장악하는 지도자가 직선제로 선출되면 군주의 권위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가 결합된 국가에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명목상 지도자인 왕이 존재하지만 정치적 주도권은 의회와 의회에서 구성한 내각에 있지요.
지도자가 젊은 유럽 국가 상당수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요. 간접선거로 총리를 선출하는 제도 안에서 젊은 지도자가 뽑힐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지요. 의원내각제에서는 다수 의석을 차지한 당의 당수가 총리로 선출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당에서 밀어주는 젊은 인사들이 정권을 주도할 기회를 더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소통을 중시하는 젊은 지도자 인기가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의원내각제가 생소할 수도 있겠는데요. 의원내각제가 어떤 제도인지, 또 의원내각제 종주국인 영국의 의회 제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봅시다.
◇영국 헌법 정신 대표하는 '대헌장'
의원내각제는 영국 의회가 군주권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18세기쯤 완성됐어요. 보통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국가는 의원내각제를 선호하는데요, 대통령제처럼 행정권을 장악하는 지도자가 직선제로 선출되면 군주의 권위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가 결합된 국가에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명목상 지도자인 왕이 존재하지만 정치적 주도권은 의회와 의회에서 구성한 내각에 있지요.
- ▲ 17세기에 메리 2세(왼쪽)는 아버지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남편인 윌리엄 3세(오른쪽)와 함께 공동 왕이 돼요. 이로써 영국은 국왕이 있어도 국가 통치는 법과 의회에 따르는 입헌군주제를 수립합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어느 자유민도 그 동료의 합법적 재판에 의하거나 또는 국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감금·압류, 법외 방치 또는 추방되거나 기타 방법으로 침해당하지 않는다. 짐도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도록 시키지도 않는다' 같은 내용이 포함됐지요. 즉 왕이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고서는 마음대로 시민들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군주권에 제한을 둔 것이에요. 대헌장은 이후 영국 헌법 기본 정신을 대표하게 돼요.
존왕의 아들 헨리 3세가 대헌장을 지키지 않자 당시 세력이 강했던 귀족 시몽 드 몽포르가 반란을 일으키고 귀족 대표들과 시민 대표들을 소집해요. 이게 바로 영국 의회의 시초예요. 14세기에는 고급 귀족, 고위 성직자들과 하급 귀족, 시민 대표들이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어 모이는데 이것이 두 의회가 공존하는 양원제로 발전했어요.
◇중국 내각제 따 온 신(新)추밀원
그 후 17세기 영국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의회를 무시하며 부당한 세금을 걷고 의회의 청교도 신자들을 박해했어요. 의원들이 국왕의 명령보다 의회의 동의와 법이 앞선다는 내용을 담은 '권리청원'을 냈으나 지켜지지 않았죠. 찰스 1세가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의회를 해산하자 왕당파와 의회파 간에 내전이 일어나요. 의회파는 청교도인들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를 '청교도혁명'(1640~1660)이라고 합니다. 의회파가 승리해 찰스 1세는 처형당하고 의회파를 이끌었던 크롬웰을 중심으로 공화 정부가 세워져요. 하지만 크롬웰이 금욕주의적 청교도 정치와 군사 독재를 벌이자 영국 국민은 오히려 왕정을 그리워하게 돼요. 결국 크롬웰이 죽고 1660년에 왕정이 복고되고 찰스 2세가 즉위합니다.
찰스 2세는 전제 왕권을 강화하면서도 의회와 큰 충돌은 피하려 했어요. 이때 중국사에 조예가 깊었던 정치가 윌리엄 템플이 찰스 2세를 도와 헌정을 개혁합니다. 템플은 명·청대에 황제 자문 기관 역할을 했던 내각제를 본받아 국왕과 하원을 타협시키려 했어요. 1679년 중국의 내각제를 응용해 '신(新)추밀원'을 설치하지요. 신추밀원의 정원은 대략 30명으로 절반은 상하 양원의 영향력 있는 귀족이, 절반은 국왕이 임명한 왕실 고위 관료가 참여하는 게 원칙이었어요. 왕에게 조언해주는 기관에 의회 출신 인사들도 들어갔으니 오늘날 내각처럼 행정권과 입법권이 융합했음을 볼 수 있어요.
◇왕 있어도 통치는 법과 의회가
그 후 1685년 즉위한 제임스 2세는 친가톨릭적 전제 정치를 노골적으로 강화해 국민의 불만이 커져 갔어요. 의회는 제임스 2세가 후사 없이 죽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제임스 2세가 오십 넘은 나이에 아들을 얻자 신교도(개신교) 의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요.
신교도 의원들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녀의 남편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에게 편지를 보내 군대를 보내달라고 부탁해요. 둘은 신교도였기 때문에 아버지이자 장인이던 제임스 2세에게 맞서기로 결심합니다. 윌리엄의 군대가 영국에 도착하자 제임스 2세의 세력은 와해되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해요. 유혈(流血) 사태 없이 성공한 이 혁명을 '명예혁명'(1688)이라고 불러요.
1689년 의회에서는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추대하고 '권리장전'을 승인하도록 해요. 의회의 동의 없이는 왕 마음대로 법률이나 법률 집행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주된 골자였지요. 왕이 이를 승인하면서 영국은 국왕이 있으나 법과 의회가 국가를 통치하는 입헌군주제가 수립됩니다.
이후 왕이 의회와 마찰을 피하고 내각이 국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의회 과반수 정당의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했고, 이것은 이후 제도화되었어요. 하원 다수파가 총리와 내각 의원, 그리고 장관을 선출했지요. 이렇듯 17세기 의회와 국왕의 대립이 거듭되면서 오늘날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의 원형이 만들어진 거예요. 이후 독일,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도 의원내각제를 채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