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조공 무역 위해 대규모 항해… 아프리카 해안까지 갔죠

입력 : 2018.07.06 03:00

[명나라 정화(鄭和)의 해외 원정]
약 30년간 일곱 차례 해외 원정 떠나… 서양보다 90년 빨리 인도양 발견

얼마 전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을 가졌지요. 사실 미국과 중국은 최근까지도 대만과 남중국해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어요. 매티스 장관은 방중 전인 지난달 15일 "중국은 명나라가 그들의 모델인 것 같다. 다른 나라들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어 굽신거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중국사에 조예가 깊은 매티스 장관이 중국의 대외 팽창을 명나라에 빗댄 이유는 조공 무역이 상하 관계를 기반으로 이뤄진 외교였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조공 무역 체제가 억압적인 상하 관계에서만 이뤄지지는 않았어요. 여러 조공 국가를 거느렸던 명나라와 그 세력을 확장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정화(鄭和, 1371~1433년 무렵)의 해외 원정에 대해 알아볼까요?

◇황제의 신임 받은 정화

조공 무역은 속국(屬國)이 종주국에 바치는 공물과 종주국이 속국에 하사하는 답례물이 오가면서 이뤄지는 공무역 형태를 말해요. 역사상 거의 늘 강대국의 위치에 있었던 중국 왕조가 약소국에 주로 행했던 무역 방식이지요. 명나라 때는 속국을 늘리기 위해 대형 함선들을 주변 국가에 보내기도 했는데요, 대표적으로 1405년부터 약 30년간 진행된 환관 정화의 해외 원정이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믈라카에 있는 정화의 동상이에요.
말레이시아 믈라카에 있는 정화의 동상이에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중국의 위세를 주변 국가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왜 환관인 정화가 맡게 되었을까요? 정화는 1371년 윈난성 곤양(昆陽)의 마씨 집안에서 태어나 본명은 마화(馬和)였어요. 조상은 원나라 때 중국에 귀화한 색목인(色目人·서역의 이방인) 이슬람교도였지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윈난성을 정복하면서 포로가 된 그는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주체(훗날 영락제)의 환관이 되었지요. 후에 정씨 성을 하사받았습니다.

당시 주체는 북경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였어요. 1392년 황위 계승자였던 형이 죽고 열여섯 살의 어린 조카가 건문제로 즉위하자 주체는 반란을 일으켰어요. 어리숙한 황제를 간신배들로부터 구한다는 명분이었죠. 주체는 당시 명의 수도였던 난징에 입성해 궁궐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건문제를 찾지 못했어요. 그는 조카인 건문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채로 1402년 명의 3대 황제, 영락제로 즉위해요. 이 과정에서 공을 세웠던 정화는 영락제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선원 2만8000명 데리고 대원정

영락제는 즉위 후 자신의 근거지였던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세계 최대 규모의 궁성인 자금성을 지었어요. 그는 북경을 거점으로 삼아 상업과 교역을 장려했지요. 정화는 영락제의 명을 받아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총 일곱 차례에 걸쳐 해외 원정을 떠납니다. 영락제의 적극적인 대외 정책의 일환이었죠.

정화의 대원정 항로
영락제가 대규모 해외 원정단을 파견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요. 통치 안정을 이룬 명나라가 위세를 떨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악화를 무역으로 회복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어요. 혹시 도망쳤을지도 모르는 건문제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지요.

1405년 6월 1차 원정 당시 원정단의 규모를 살펴볼게요. 함선 62척에 선원 2만8000여 명이 탔습니다. 2500t까지 적재할 수 있는, 길이 137m에 너비가 56m에 달하는 대형 선박도 포함돼 있었다고 해요. 선박에는 속국에 하사할 도자기, 비단, 금 같은 화물도 대량으로 싣고 있었지요. 이는 80여 년 후 태평양을 항해했던 콜럼버스의 함대가 250t을 적재할 수 있는 배 3척과 선원 90여 명으로 구성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이죠.

남중국해에서 인도양으로 나아가서 아프리카의 동해안까지 이르는 먼 항해였지요. 정화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양을 발견한 것보다 90여 년 더 빨리 인도양을 발견했어요. 이는 당시 중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항해 기술과 선박 제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정화가 이슬람교도였고 당시 선단에는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이들이 있었어요. 이 때문에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동아프리카의 이슬람 왕조들과 교류했을 때 그들의 정치·제도·종교·문화 등을 유연한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영락제가 정화를 해외 원정의 총책임자로 임명한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요.

◇상대국 존중하는 선린외교 측면도

정화가 방문한 국가들은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고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어요. 각 국가의 사신들은 영락제를 알현하기 위해 정화의 함대를 따라갔는데요, 명나라는 외국의 사신단이 갖고 온 조공품보다 더 큰 답례품을 내리는 게 보통이었지요. 한쪽이 강제로 취하는 관계가 아니라 평화와 공생의 관계였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2차 항해에서 정화의 함대가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 불교 의식에 참여하고 보시(布施)했다는 걸 보면 정화와 사신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켰음을 알 수 있지요.

1424년 영락제가 죽은 후 즉위한 홍희제는 막대한 재정이 들어가는 해외 원정을 반대했어요. 홍희제는 정화의 원정단을 해산하고 원정 기록도 폐기했지요. 그다음 황제인 선덕제는 1433년 7차 원정단을 파견했지만 정화가 죽으면서 명나라의 대항해도 끝나게 됩니다.

정화의 항해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 왕래와 무역이 활발해졌고 중국인들의 세계 인식도 넓어졌어요. 또 화교도 점차 증가해 16세기에는 동남아시아 화교 인구가 10만 명에 달했다고 해요. 자바 섬, 수마트라 섬, 태국 등에 있는 화교들은 정화를 신처럼 모시며 사당을 지었고 지금까지도 정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정화의 해외 원정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명나라의 힘을 과시하면서 내부적으로 황제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기 위함이었죠. 하지만 상대 국가를 존중하며 종주국이 더 큰 책임감을 가졌던 선린(善隣)외교의 측면도 있었답니다.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