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로마 안에서 평화'… 오현제 때 전성기 200년 이어졌죠
입력 : 2018.06.29 03:00
[팍스 로마나(Pax Romana)]
도시국가서 시작해 지중해 제패… 후계자 미리 선포해 정치적 안정
북아프리카, 영국까지 영토 넓혀… 파리·런던 도심도 이때 생겼어요
얼마 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가 "트럼프 대통령의 무한 독주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몰락하고 있다"고 주장했어요. '팍스 아메리카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향력이 커진 미국이 세계의 평화 질서를 유지하는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인데요. 고대 로마제국이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서 따온 말이에요. 2000여 년 전 세계 질서를 유지하던 로마제국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요?
◇지중해 일대 지배한 로마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흐르는 테베레강 하류의 작은 도시국가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왕이 다스렸으나 기원전 6세기에 귀족들이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웠어요. 공화정은 왕 이외의 개인 또는 집단이 통치하는 정치 형태예요.
◇지중해 일대 지배한 로마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흐르는 테베레강 하류의 작은 도시국가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왕이 다스렸으나 기원전 6세기에 귀족들이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웠어요. 공화정은 왕 이외의 개인 또는 집단이 통치하는 정치 형태예요.
- ▲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갑자기 암살되면서 19세에 로마제국을 떠안게 됐어요.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했던 때부터 로마제국의 전성기, 팍스 로마나가 200여 년간 지속됩니다. /위키피디아
카이사르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에 로마제국의 첫 황제가 돼요.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고 로마를 다스렸지요. 역사가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통치하게 된 시기부터 기원후 180년까지의 200여 년을 로마의 평화 시대, 팍스 로마나라고 불러요.
◇로마제국의 전성기, 오현제 시대
옥타비아누스가 죽자 로마는 황제가 암살당하거나 내전이 벌어지는 등 잠시 정치적 혼란을 겪기도 했어요. 하지만 기원후 96년, 네르바가 67세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로마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지요.
네르바는 황제로서 로마를 통치한 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아요. 그러나 로마에 기여한 공은 매우 컸어요. 네르바는 황제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과 내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능한 사람을 양자로 맞아들인 뒤 일찌감치 후계자로 선포하는 제도를 만들었죠. 네르바 이후 네 명이 이 방식을 통해 황제가 되었는데 이 시기 로마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어요. 네르바를 포함해 이후 네 황제가 로마를 다스렸던 시기를 오현제(五賢帝) 시대라고 해요. 현명한 다섯 황제라는 뜻이죠.
- ▲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 최대 영토 - 트라야누스는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늘린 황제였어요. 현재의 영국 남부, 이집트 일부,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까지 통치했죠.
트라야누스가 죽자 조카인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했어요. 그는 영토 확장에 힘썼던 트라야누스와는 달리 정복한 영토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집중했어요. 우선 동쪽의 파르티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게르만족·켈트족 등 이민족을 상대로 한 소모전을 멈추기 위해 성벽을 쌓아 침략을 막도록 했어요. 이때 브리타니아(오늘날 영국)에 만들어진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훗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구분하는 경계가 되었지요.
오현제 중 제4대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거쳐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됐어요. 그는 이민족과 전쟁이 많았던 시기에 로마를 통치했죠. 전쟁터 막사에서 틈틈이 글을 써 철학책 '명상록'을 남기기도 했어요. 중국 후한의 수도 뤄양에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지요. 아우렐리우스는 중국의 역사서에 대진국(중국에서 로마를 부르던 말) 왕 안돈(安敦)이라고 기록돼 있어요.
◇팍스 로마나가 남긴 것들
팍스 로마나 시절엔 북부 지역 일부를 제외한 모든 유럽이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어요. 오늘날 유럽 주요 국가의 대도시인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오스트리아 빈 도심이 이때 만들어졌지요. 또 영토가 커지면서 제국 곳곳을 이어주는 도로를 건설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지요. 군인들이 행군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 길로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유럽은 하나'라는 인식이 생겨나기도 했지요.
아우렐리우스가 말년에 욕심을 부려 후계자를 잘못 정하면서 팍스 로마나는 허무하게 끝나게 돼요. 네르바 때 만들어진 황제 계승 방식을 따르지 않고 아들 코모두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던 것이죠. 황제가 된 코모두스는 나랏돈을 제 것인 양 펑펑 쓰고, 그것도 모자라 부자들에게서 강제로 재산을 빼앗았어요. 설상가상으로 스스로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의 후예라고 주장하며 자기를 신으로 받들라고 했어요. 결국 친위대가 192년 코모두스를 암살했죠.
이후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이 국경선을 뚫고 쳐들어와 로마를 약탈하고, 동쪽에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쳐들어와요. 로마에서는 대규모 전염병이 돌기도 했죠. 50여 년간 황제가 26명 바뀌는 등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어요.
결국 로마는 서서히 몰락해 4세기 말에는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리됐고, 5세기 중엽 서로마는 게르만족에게 멸망당하고 말아요. 이후 동로마(비잔티움 제국)가 잠시 번성하기도 했으나 과거의 영광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카이사르의 어린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조카인 옥타비아누스를 제1후계자로 지정했어요.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19세에 불과했죠.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고 공화파 귀족들을 숙청해갔어요. 그렇게 권력을 장악해가며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