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궁녀와 의녀, 유교사회 조선의 '전문직 여성'이었죠

입력 : 2018.06.20 03:06

조선시대 여성 공무원

최근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69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직 공무원의 여성 비율이 절반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2017년도 국가공무원 임시 집계 결과 교사·경찰을 포함한 국가공무원 약 65만명 중 여성 공무원이 사상 처음으로 남성 공무원보다 많아졌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여성 공무원의 비율이 높아진 것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에요. 그렇다면 유교 사상으로 남녀 간 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에도 여성 공무원이 있었을까요?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조선 사회

기원전 500년 무렵 중국에서는 사상가 공자의 가르침이 체계적인 철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유학' 또는 '유교'라는 사상과 종교로 발전했어요. 그 뒤 유교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 등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쳤지요. 특히 조선시대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고 선발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학문이 되었어요.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받들었던 조선 왕조는 유교를 주요 통치 이념으로 삼았고, 모든 의례와 제도를 유교식으로 고쳐 조선 사회를 유교 사회로 만들었지요.

유교는 신분과 지위, 성별에 따라 엄격한 차별을 두었기 때문에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낮았어요. 이는 유교의 남녀유별(男女有別), 즉 남자가 할 일과 여자가 할 일을 철저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따라서 삼종지도(三從之道), 즉 여성이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유교 경전의 가르침이 조선 사회에 널리 퍼졌지요.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고 해도 조선시대에 여성 공무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성 공무원으로는 궁궐에서 일하는 궁녀(宮女)를 들 수 있습니다.

궁녀는 궁궐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의 하나로 내명부(內命婦)에 소속돼 있었어요. 정 5품에서 종 9품에 걸친 직위를 갖고 필요한 업무를 담당했지요. 참고로 내명부의 정 1품 빈에서 종 4품 숙원은 임금의 후궁들만 해당하는 품계였기 때문에 지금으로 치면 고위 여성 공무원에 해당해요.

◇궁녀는 조선시대의 여자 공무원

궁녀들은 왕과 왕비의 침실 시중을 담당하는 '지밀'과 그 밖의 궁궐 살림을 나누어 맡아보는 여섯 개 부서인 '육처소(六處所)'를 합해 모두 7개 부서에 소속돼 일을 했어요.

육처소에서 맡은 일은 바느질로 옷을 만드는 일을 담당한 '침방', 옷에 수를 놓거나 장식물을 다는 일을 담당한 '수방',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고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곳의 청소를 담당한 '세수간', 음식을 만드는 일을 담당한 '소주방', 음료나 한과 등 간식을 준비하는 일을 맡은 '생과방', 빨래나 다듬이질, 다리미질 등 세탁에 관한 일을 담당한 '세답방'이 있었어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정서용
궁녀는 10년 한 번씩 선발했는데 실제로 각 처소에서 필요한 인원을 그때그때 채우는 '수시 채용' 방식이었어요. 일반적으로 7~10세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10~15년 정도 필요한 훈련을 받은 뒤 정식 궁녀인 '나인'이 될 수 있었지요. 나인에서 15년 정도 지나면 궁녀 중 최고 품계인 '상궁(정5품)'에 오를 수 있었고요.

궁녀의 숫자는 500~600명 정도 되었고, 품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매달 곡식이나 옷감 등을 월급으로 받았어요. 또 궁궐에는 물 긷는 일 등 막일을 담당했던 '무수리', 궁녀들의 심부름을 해주는 '각심이' 등도 있었는데, 모두 월급을 국가에서 지급하였던 하급 공무원에 해당하지요.

조선시대 궁녀는 왕실이나 관청에 소속된 공(公)노비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원칙이었어요. 간혹 왕실이 양인(평민 계층)에서 궁녀를 선발하기도 했고, 양인의 신분이지만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궁녀로 들어온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공노비 등 천민 출신이었지요.

이는 궁녀가 힘들고 고된 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데다 평생 결혼도 하지 못하고 혼자 살아야 했기 때문이에요. 여자는 자식을 낳고 남편을 위하면서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일반 백성은 궁녀로 나가는 것을 기피했던 거지요.

◇의녀도 조선시대 여자 공무원

조선 3대 임금 태종 때 부인들의 병을 돌보기 위해 처음 생겨난 '의녀(醫女)'는 관노비(官奴婢) 중 어린 여자아이를 뽑아 의술을 가르치면서 탄생한 여성 공무원이에요.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3년에 한 번씩 의녀를 뽑았고, 그 수는 150명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이 중 실력이 뛰어난 70명은 내의원(왕의 약을 조제하던 관서)에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각 지방 의원에 소속되었어요. 내의원 의녀 중 일부만 궁궐에서 거주하고 대부분은 출퇴근 방식으로 일한 데다 결혼도 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은 의녀들을 동원해 기생처럼 술을 따르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는 기행을 저질렀어요. 이후 의녀를 궁중 공연에 악기 연주나 춤을 추는 여악(女樂)으로 데려다 쓰는 일이 잦아지면서 제도가 변질됐어요. 의술을 행하는 전문직 여성이었던 셈이지만 당시 여성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대우를 받았던 셈이에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