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아르헨, 영국령 기습… 英 대처 총리 74일 만에 탈환했죠
포클랜드전쟁
최근 태평양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국과 중국 간 갈등이 점점 첨예해지고 있다고 해요. 남중국해는 중국 남쪽과 필리핀·인도차이나반도·보르네오섬으로 둘러싸인 바다인데요.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자 미국 등이 '남중국해는 모든 국가의 공해(公海)'라며 군함을 파견하는 등 강력 대응에 나선 것이지요.
전문가들은 남중국해 문제가 '아시아판 포클랜드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포클랜드전쟁이 과연 어땠기에 오늘날 남중국해 분쟁과 비교되는 걸까요?
◇포클랜드제도 발견과 영토 분쟁
포클랜드제도(Falkland Islands)는 남아메리카 동쪽 남대서양에 있는 여러 섬을 말해요. 16세기 말 영국의 탐험가 존 데이비스가 발견했을 당시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지요. 1690년 영국 탐험가 존 스트롱이 이 섬에 처음 상륙했는데 당시 영국 해군이던 포클랜드 자작의 이름을 따서 '포클랜드섬'이라 이름 붙였어요.
포클랜드제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건 1764년 프랑스인들이 동(東)포클랜드섬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였습니다. 3년 후 이 지역 영유권은 스페인으로 넘어갔는데요. 비슷한 시기 영국이 서(西)포클랜드에 진출하면서 서쪽은 영국 식민지가 됐어요. 그러나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이 발발하자 영국은 전력을 미국에 집중하기 위해 포클랜드에서 철수했고, 1811년 스페인도 남아메리카 독립 운동이 확산하면서 포클랜드에서 철수했지요. 이렇게 포클랜드제도는 다시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돌아갔어요.
- ▲ 전쟁에 참여한 영국 군함에서 바라본 포클랜드제도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10여 년간 무인도나 다름없던 포클랜드에 갑자기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건 아르헨티나였어요.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포클랜드에 대한 권리를 인수받았다고 주장하며 1826년 포클랜드제도에 주민 정착지를 건설했지요. 그러던 1831년, 아르헨티나 해군이 포클랜드 인근에서 어로(수산물 채취) 작업을 하던 미국 선박 3척을 억류하는 일이 벌어졌는데요. 이에 미국이 아르헨티나의 정착지를 공격하고 포클랜드제도가 특정 국가의 소유가 아닌 모든 국가의 소유라고 선언하면서 영유권 분쟁이 시작됩니다.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에 반발하며 적극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1830년대 초 포클랜드에 군대를 보내 영국 주권을 다시 선언하고, 아르헨티나 정착민을 모두 추방했지요. 그리고 1800명 규모의 영국 이주민 정착지를 형성하고 정식 행정 체계까지 만들었어요. 동포클랜드에 있는 수도 '포트스탠리'는 원거리 항해를 하는 영국 선박들이 이용하는 항구로 발달시켰어요.
◇정권의 운명을 바꾼 포클랜드전쟁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 포클랜드 분쟁은 처음엔 그리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에 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해지기 시작합니다.
군부 정권이 들어선 후 아르헨티나는 물가가 150%나 뛰어오르고 실업자가 늘면서 경제가 침체돼 국민들의 불만이 매우 컸어요. 외채(외국에 진 빚)가 국민총생산의 20%에 육박할 만큼 경제 사정이 안 좋았고, 민주 세력이 군부 독재에 반발하면서 정권은 큰 위기에 직면했지요. 이에 군부는 국내 문제에 대한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비밀리에 포클랜드 공격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 ▲ 포클랜드전쟁에서 패한 아르헨티나 군인들이 버리고 간 무기들.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는 해군 함대와 병력 약 2500명을 동원해 포클랜드를 공격했어요. 영국 수비대 100여 명이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주민들의 안전을 우려해 이틀 만에 항복하고 말았지요. 빠르게 포클랜드를 장악한 아르헨티나는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각각 '말비나스'와 '푸에르토아르헨티노'로 바꾸고 포클랜드를 장악해 나갔어요.
영국 정부는 즉각 후속 대응에 나섰어요. 당시 영국도 마거릿 대처 총리의 강력한 개혁 정책으로 사회 곳곳에서 불만이 커지고 있었는데요. 포클랜드 침공 소식은 이런 부정적 국내 여론의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요. 영국은 항공모함 2척을 비롯한 군함 90여 척을 포클랜드에 출동시키고, 아르헨티나에 경제 제재를 가했어요. 다른 유럽 국가들에도 경제 제재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지요. 미국도 영국을 지지하고 나섰어요.
전쟁에서 패하자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은 완전히 붕괴했어요. 반면 영국의 대처 정부는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1983년 총선에서 재집권하는 데 성공했지요. 전쟁 직후 영국은 포클랜드의 병력 규모를 2000명으로 늘리고 헌법을 개정해 포클랜드 주민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어요.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전쟁 직후 잠시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가 1990년에야 다시 회복했지요.
포클랜드제도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남방 항로이면서 남극 탐사를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요충지예요. 특히 1970년대 포클랜드 일대에 석유 약 2000억 배럴과 다량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잠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남중국해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이 제2의 포클랜드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국제사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