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왕보다 당당한 왕비… 표정·자세로 권력관계까지 그렸죠

입력 : 2018.06.09 03:05

스페인이 자랑하는 국민 화가, 고야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

유럽 남서부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스페인(에스파냐)의 정식 국가명은 스페인 왕국(Kingdom of Spain)입니다. 스페인을 상징하는 대표적 문화유산으로는 소를 상대로 싸우는 투우(鬪牛), 정열적인 전통 춤인 플라멩코, 뜨거운 태양 아래 펼쳐지는 화려한 축제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태양의 땅, 열정의 나라로 불리는 스페인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국민 화가가 있어요. 바로 프란시스코 고야(Goya·1746~1828)입니다. 스페인이 고야를 위대한 화가로 숭배하는 이유는 스페인 고유의 민족 정서와 역사적 사건을 그림에 담고,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폭력성을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국립미술관을 방문하면 고야의 걸작인 〈작품1〉을 감상할 수 있어요. 초상화 속 인물들은 당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입니다.

작품1 -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0~1801년.
작품1 -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0~1801년.

카를로스 4세는 수석 궁정화가인 고야에게 왕실 초상화를 주문했어요. 수석 화가는 궁정에서 일하는 여러 화가 중에서 우두머리 화가를 말해요. 과거 유럽 궁정은 최고 실력을 가진 1급 화가에게 '왕의 수석 화가'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이 그림은 미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실 초상화 중 한 점으로 꼽혀요. 왕실의 권위, 부유함, 사회적 지위를 확인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인물의 개성, 신체적 특징, 감정 상태까지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왕실 초상화는 왕족들을 근사하게 보이도록 연출해 왕실의 위엄을 널리 알리는 도구로 활용되었어요. 그러나 고야는 왕족들을 이상적으로 꾸민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어요. 각 인물의 개성과 감정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초상화에 담았지요. 예를 들면 그림 속 왕실 가족들은 모두 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옷을 입었어요. 또 남자인 왕과 왕자, 왕의 남동생, 사위는 예복을 입었고, 왕실 훈장이 달린 어깨띠를 매고 있어요.

자, 그림 한가운데 서 있는 왕과 왕비의 얼굴과 자세를 관찰해보세요. 마리아 루이사 왕비가 절대 권력자인 왕보다 훨씬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위엄이 느껴집니다. 실제 카를로스 4세는 무능한 왕이었어요. 국가 권력을 왕비와 그녀가 신임하는 재상인 마누엘 고도이에게 넘기고 사냥을 즐기다가 나라를 어려운 지경에 빠뜨렸거든요. 고야는 스페인의 실제 권력자는 왕이 아니라 왕비라는 사실을 인물의 얼굴 표정과 자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준 거죠.

참, 이 초상화에서 고야의 모습도 찾을 수 있어요. 그림 왼쪽 뒤편, 한 남자가 커다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바로 고야예요. 당시 서양 미술에선 화가가 집단 초상화에 자신의 모습을 눈에 띄지 않게 그려 넣는 전통이 있었답니다.

작품2 -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1814년.
작품2 -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1814년.

고야는 스페인 국민의 애국심을 일깨우는 걸작도 남겼어요. 〈작품2〉는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 군대가 마드리드 시민을 교외에서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장면을 그린 거예요. 당시 프랑스 군대는 폭력을 써서 도시를 억지로 빼앗고 많은 시민을 살해했어요. 침략자의 잔인한 행동에 분노한 스페인 민중이 보복하려고 반격에 나섰다가 붙잡혀 총살형을 당한 비극적인 날이 '1808년 5월 3일'인 것이죠.

사진1 -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우표.
사진1 -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우표.

점령군에 용감히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스페인 민중의 애국심은 고야의 창작 혼을 자극했어요. 고야는 실제로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에 예술가적 상상력을 덧붙여 인간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는 전쟁이라는 것을 그림을 통해 일깨워주었어요. 이 그림이 스페인 우표 〈사진1〉에 실린 이유는 '전쟁화의 걸작'이라는 미술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데다 스페인 국민들의 가슴에 자유주의 정신과 애국심의 상징으로 영원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고야는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폭력성과 광기(狂氣), 어리석음을 폭로하는 그림도 남겼어요. 〈작품3〉에서 의자에 앉은 한 남자가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어요. 남자는 글을 쓰다가 잠깐 잠든 것 같아요. 책상 위에 종이와 펜이 놓여 있거든요.

작품3 -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1797~1799년.
작품3 -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1797~1799년.

그런데 잠든 남자 주변을 고양이, 스라소니(고양잇과 동물), 올빼미, 박쥐 떼가 에워싸고 있어요. 맨 왼쪽 올빼미는 날카로운 펜으로 잠든 남자의 팔을 찌릅니다. 한눈에 보아도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림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요? 답은 왼쪽 아래 책상 면에 적힌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라는 글귀가 말해줍니다.

남자는 이성적인 인간, 잠은 본능이 지배하는 무의식의 세계, 야생동물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상징해요. 즉 인간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잃어버리면 자신도 모르게 괴물이 되어 간다는 메시지를 그림을 통해 전한 겁니다.

오늘날 고야는 인물의 개성과 심리 상태까지도 표현한 초상화의 거장,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전쟁화의 대가,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꿰뚫어 본 철학가라는 찬사를 받고 있어요. 그래서 스페인 국민들이 위대한 국민 화가로 숭배하는 거지요.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