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히틀러 핵폭탄 연구 소식에… 美, 극비리 개발 착수했죠

입력 : 2018.06.01 03:08

[맨해튼 프로젝트]

1938년 獨 핵분열 실험에 성공하자 美, 20억달러·13만명 투입해 추진
핵개발 처음 제안했던 아인슈타인, 日 원폭 투하에 "이럴 줄 몰라" 통탄

얼마 전 북한이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 입구를 폭파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어요. 풍계리 핵실험장은 북한의 1~6차 핵실험이 진행된 장소인데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북한에 지속적으로 비핵화를 요구하자, 북한이 결국 핵실험장 입구를 폭파한 것이지요.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핵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오늘은 미국이 세계 최초 핵무기를 개발한 과정을 알아볼게요.

◇비밀리에 추진된 핵무기 개발

원자핵 분열을 이용해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건 1903년 영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Rutherford·1871~1937)와 프레더릭 소디(Soddy·1877~1956)가 처음 알아냈어요. 원자핵이 분열할 때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오는데 이를 이용해 강력한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었지요. 그 뒤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발발로 재조명을 받습니다.

첫 실험은 독일에서 먼저 이뤄졌어요. 1938년 독일 과학자들은 방사성물질인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는 연쇄 핵분열 반응 실험에 성공했어요. 나치 독일은 우라늄을 확보해 핵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지요. 이에 미국의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Einstein·1879~1955)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독일의 히틀러보다 먼저 핵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독일 출생의 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은 1933년 나치당을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해온 터였지요.

다른 저명한 여러 과학자들도 핵폭탄의 필요성에 대한 편지를 연이어 보내면서 미국 정부는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 검토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독일에 맞서 싸우던 영국과 핵무기 개발을 위한 정보를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당시 영국은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인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튜브 앨로이스(Tube Alloys)'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1941년 말 일본이 미국 땅인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합니다.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하에 본격적인 핵폭탄 개발에 착수했어요. 이 프로그램은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는데, 워낙 극비리에 추진되었기 때문에 부통령이었던 트루먼도 몰랐을 정도였어요.

비밀리에 진행됐지만 그 규모는 어마어마했어요. 보어, 페르미, 파인먼, 위그너, 폰 노이만 등 당대 내로라하는 최고의 수학·과학자들이 연구에 참여했어요. 당시 20억달러 이상의 막대한 예산이 배정됐고, 13만 명이 넘는 인력이 투입됐으며, 미국 20여 개 지역에 관련 연구소가 운영되었죠. 가장 핵심적인 개발 기지 역할을 했던 곳은 뉴멕시코주(州)의 로스 앨러모스(Los Alamos) 연구소였어요.

1945년 7월 16일, 최초의 핵실험(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했어요. 30m 높이 철탑 위에서 '베이비(Baby)'라는 별명을 가진 플루토늄 폭탄을 폭발시켰는데, 그 결과는 어마어마했어요. 폭발과 동시에 높이 15㎞, 폭 1.5㎞에 이르는 거대한 버섯 모양 구름이 주위를 뒤덮어버렸지요. 폭탄을 터뜨린 철탑은 순식간에 증발해버렸고, 주변 아스팔트는 뜨거운 열기에 녹아 초록색 유리 결정체로 변해버렸어요.

◇수많은 논란을 낳은 원자폭탄 투하

미국이 트리니티 핵실험에 성공했을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어요. 이보다 앞선 1945년 4월 30일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5월 8일 독일은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했지요. 유럽 땅에서 전쟁은 실질적으로 끝이 난 상태였어요. 트리니티 실험 이후 독일을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양심의 가책과 회의를 갖기 시작했어요. 핵폭탄이 전 세계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이 새 대통령에 취임한 트루먼에게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어요.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폭발한 원자폭탄 모습.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폭발한 원자폭탄 모습. /위키피디아

그러나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 정부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투하합니다. 히로시마에는 우라늄으로 만든 폭탄(일명 '리틀 보이')이, 나가사키에는 플루토늄으로 만든 폭탄(일명 '팻 맨')이 투하됐지요. 두 도시에서 10만여 명이 즉각 사망했고, 이후에도 수십만 명이 화상과 방사선 피폭으로 서서히 죽어갔어요. 이에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내 '맨해튼 프로젝트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낼 줄 몰랐다'며 통탄했다고 해요.

당시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했어야만 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려요. 찬성론자들은 핵폭탄 투하가 전쟁을 일찍 종식시켜 수십만 명의 귀중한 생명을 구한 것이라고 주장해요. 그 당시 일본은 전 국민이 다 죽을 때까지 항복하지 않겠다고 저항하던 상황이었고, 미군의 피해는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지요. 반면 반대론자들은 일본의 항복은 시간문제였을 뿐인데 핵폭탄 투하로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키고 인류 역사에 좋지 않은 사례를 남겼다고 주장해요.

현재 세계 각국이 보유한 핵무기 양은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라고 해요.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기에 비핵화는 인류가 함께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된 것이랍니다.

☞‘원자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은 물리학자 오펜하이머(Oppenheimer·1904~1967)였어요. 그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핵폭탄 개발에 성공해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려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무기 사용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모든 공직에서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어요.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