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X레이로 찍자… 상처 입은 남자 옆에 前 연인 얼굴 나타났죠

입력 : 2018.05.26 03:06

[자비에 루케지: The Unseen 展]

국내 첫 전시 여는 佛 사진가 루케지, 엑스레이로 작품 찍어 비밀 밝혀냈죠
'모나리자'엔 흠집·여러겹 덧칠 흔적… 고흐 자화상엔 독특한 붓질 드러나요

"카메라는 보이는 것을 찍지만, 엑스레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찍는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자비에 루케지(Lucchesi·59)의 말입니다. 오래도록 사진 작업을 해오던 루케지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찍은 사진들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남들이 볼 수 없는 장면을 찍어보고 싶은 열망에 부풀어 올랐지요. 그는 질병 진단의 목적으로 주로 사용하는 엑스레이에 관심을 가졌고, 이후 대학원에서 '엑스레이와 이미지'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어요.

엑스레이는 빛(전자기파)의 일종인데 거울이나 렌즈에도 거의 반사되거나 굴절되지 않고 사물을 꿰뚫고 지나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요. 1895년 독일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Röntgen·1845~1923)이 연구 도중 우연히 발견했는데, 어떤 빛이 아내의 손을 투과해 뼈까지 보여주는 현상을 목격한 것이지요. 그래서 '정체가 뭔지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수학에서 미지수를 뜻하는 알파벳 X(엑스)를 붙여 엑스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루케지는 동물과 식물, 각종 기계 제품을 엑스레이로 찍은 후 그것들을 '내면의 풍경'이라 불렀어요. 유명 미술관에 걸린 명화를 엑스레이로 찍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옛 거장들이 남긴 비밀스러운 밑그림까지 드러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한층 불러일으켰지요. 2006년에는 프랑스 파리 피카소미술관에서 루케지가 엑스레이로 찍은 피카소 작품 이미지들을 전시했는데, 이를 계기로 그는 '엑스레이 예술가'로 유명해졌어요. 오는 6월 2일까지 서울 송파구 한미사진미술관에 가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자비에 루케지의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원작(작품3)과 루케지가 찍은 ‘모나리자’ 엑스레이 사진(작품4).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원작(작품3)과 루케지가 찍은 ‘모나리자’ 엑스레이 사진(작품4). /한미사진미술관 ‘자비에 루케지: The Unseen’ 展

작품4는 엑스레이에 노출된 '모나리자'의 이미지예요. '모나리자'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르네상스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da Vinci·1452~1519)의 그림(작품3)으로,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일 것입니다. 이런 작품을 엑스레이로 찍는 것 자체가 사실 루케지에게 큰 과제였어요. '모나리자'는 프랑스의 최고 문화재이자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자칫 작품에 손상이 생긴다거나 도난이라도 당할까 봐 철통 같은 보안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부터 60여 년 전 누군가 갑작스레 '모나리자'에 돌을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때 액자의 유리가 깨어지면서 그림 안에까지 상처가 났지요. 당대 최고의 미술 전문가들이 모여 표면의 흠집을 완벽하게 제거하고 그림을 원래 상태로 복원시킨 뒤 다시 미술관에 걸었는데요. 루케지가 이를 엑스레이로 찍으니 그때 상처가 다시 선명하게 나타났답니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 여인의 팔꿈치 부분에 돌 맞은 자국이 까만 점처럼 보입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하나의 작품이지만 그 표면은 사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루케지는 엑스레이 촬영을 통해 겹겹이 다른 모습의 이미지들을 발굴해 냈어요. 그리고 그 이미지들을 가지고 컴퓨터 회면상에서 색을 입히기도 하고, 인쇄해서 그 위에 직접 색을 칠하기도 했지요. 다빈치의 원작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수십 개의 모나리자가 재탄생한 셈이에요.

작품5 루케지가 찍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작품5 - 루케지가 찍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한미사진미술관 ‘자비에 루케지: The Unseen’ 展

작품5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걸린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an Gogh·1853~1890)의 '자화상'을 엑스레이로 찍은 후 색칠한 것입니다. 그림 속 고흐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띠 같은 경계선은 알고 보면 나무로 된 캔버스 틀입니다. 이 작품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위로 솟구쳐 오르는 고흐 특유의 붓질이 더 도드라져 보여요.

캔버스에 칠해진 물감을 엑스레이로 보면 붓질이 한 번에 깨끗하게 이루어졌는지, 여러 차례에 걸쳐 덧칠해진 것인지 확인할 수 있어요. 언젠가 고흐의 작품을 흉내 낸 위작(僞作·가짜 작품)이 돌아다녀 세계 미술 시장이 떠들썩했는데요. 위작 논란이 일 경우 수사 당국은 작품에 엑스레이를 비추어 보곤 한답니다. 보통 화가는 자기만의 고유한 붓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붓질의 형태를 비교해보면 작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낼 수 있으니까요.

작품2 역시 오르세 미술관에서 촬영한 것으로, 19세기 리얼리즘(사실주의) 미술의 대가 구스타브 쿠르베(Courbet·1819~1877)의 자화상 '상처 입은 남자'(작품1)가 원작입니다. 한 남자가 다쳐서 바닥에 누워 있는 이 그림을 엑스레이로 찍으니 오른쪽으로 흐릿하게 여자의 얼굴 하나가 더 나타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구스타브 쿠르베의 자화상 ‘상처 입은 남자’(작품1)와 루케지가 찍은 엑스레이 사진(작품2).
구스타브 쿠르베의 자화상 ‘상처 입은 남자’(작품1)와 루케지가 찍은 엑스레이 사진(작품2). /한미사진미술관 ‘자비에 루케지: The Unseen’ 展

화가는 맨 처음에 사랑하는 여인을 끌어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고 해요. 그런데 그녀가 떠난 지 한참 후 여자의 모습을 덮어 다시 그렸고, 결국 그림에서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만 상처 입은 모습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과연 쿠르베는 후대 사람들이 자기 그림의 비밀을 알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세상에는 익숙하다는 이유로 내가 아는 만큼만 보고 더 이상 보려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술가가 되려면 남들이 볼 수 없는 차원까지 보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일지라도 다르게 보려는 시도가 필요한 것이랍니다.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