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흐릿한 풍경화 속에 증기車 등 대영제국의 영광 담았죠

입력 : 2018.05.19 03:08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

'풍경화의 셰익스피어' 불리는 화가, 사물 형태보다 대기 변화·인상 중시
흐린 윤곽선으로 빛·안개·증기 표현… 모네 등 인상주의 탄생에 영감 줬죠

작품1 - 윌리엄 터너, ‘자화상’, 1799년.
작품1 - 윌리엄 터너, ‘자화상’, 1799년.

유럽 북서쪽에 있는 섬나라 영국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가 하나로 합쳐 이루어진 연합 왕국입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 찬란한 문화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영국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예술가가 많아요. 대표적 인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평가받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풍경화의 셰익스피어'라는 윌리엄 터너(Turner·1775~1851)를 꼽을 수 있어요. 영국 국립 미술관인 테이트 갤러리를 방문하면 터너의 자화상〈작품1〉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터너가 영국의 '국민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그림들이 과거 대영제국 시대의 영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할 만큼 전 세계에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최강대국이었어요. 1860년 증기기관 발명과 기계 혁명으로 대표되는 산업혁명을 이끌던 기술혁신 국가였지요. 산업혁명을 계기로 유럽은 농업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산업사회로 발전했어요.

산업혁명의 주역을 담당했던 철도를 세계 최초로 건설한 나라도 영국이었는데, 이는 영국이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답니다. 비 오는 날 템스강 다리 위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를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그린 〈작품2〉는 영국이 철도의 역사를 만든 주인공이라는 자부심을 일깨워줍니다.

작품2 - 윌리엄 터너, ‘비, 증기 그리고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1844년.
작품2 - 윌리엄 터너, ‘비, 증기 그리고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1844년.

터너는 1차 산업혁명 시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증기기관차에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증기기관차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상품이나 먼 곳에 가야 하는 승객을 마차보다 빠르고 편리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했거든요. 하지만 터너는 이 그림에서 증기기관차의 형태를 자세히 그리지 않았어요. 기관차의 겉모습보다는 빠른 속도와 날씨, 대기의 변화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목이 '비, 증기 그리고 속도'예요. 이런 것은 그림으로 표현하기 매우 어렵지만 터너가 개발한 구도와 기법을 활용해 비에 젖은 대기, 기관차가 내뿜는 증기, 속도감을 완벽하게 하나로 결합했어요.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경계선을 없애고, 철도는 대각선 방향으로 표현하고, 관객이 기차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선택했어요. 또 연료인 석탄이 타는 연실(煙室)과 증기를 내뿜는 굴뚝을 강조하는 반면 기차 앞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비를 머금은 흐릿한 대기 속으로 스며들게 표현했어요. 자연현상인 물·불·공기와 기술혁신의 상징인 증기기관차가 하나가 된 이 그림은 터너를 왜 '대기(大氣)의 화가'로 부르는지 알려줍니다.

작품3 - 윌리엄 터너,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 1839년.
작품3 - 윌리엄 터너,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 1839년.

증기선이 '전함(戰艦) 테메레르'를 조선소로 끌고 가는 장면을 그린 〈작품3〉도 화려했던 대영제국 시절의 영광을 떠올리게 합니다. 영국의 전함 테메레르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를 무찔렀던 전설적 군함입니다. 트라팔가 해전 승리로 영국 해군은 세계 바다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영국민들에게 역사적 승리를 안겨준 전함 테메레르도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어요. 돛을 달아 풍력(風力)으로 움직이는 범선(帆船)으로서 수명이 다해 해체될 운명을 맞았거든요. 전함 테메레르를 끌고 가는 배는 새로운 해양 운송 수단으로 등장한 증기선입니다.

터너는 비록 전함 테메레르가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대영제국의 찬란한 영광을 상징하는 배였다는 사실을 기념하고 싶었어요. 커다란 전함 테메레르는 밝게, 작은 증기선은 어둡게 대비해 표현했지요. 또 해가 질 무렵 노을빛이 바다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시간대를 선택했어요. 여기서 지는 해는 전함 테메레르를 상징하는데, 해를 전함에 비유한 것도 의미가 깊어요. 해는 힘과 권위, 부를 상징하거든요.

낡은 전함 테메레르가 품위를 지키며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을 그린 이 바다 풍경화는 영국인들을 감동시켰어요. 1995년 BBC라디오가 '영국이 소장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그림'을 뽑는 설문 조사에서 이 그림이 1위에 올랐다고 해요. 대영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싶은 영국인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죠.

작품4 - 윌리엄 터너, ‘해질 녘 강변마을’, 1830~1840년.
작품4 - 윌리엄 터너, ‘해질 녘 강변마을’, 1830~1840년.

터너의 풍경화는 19세기 중반 생겨난 새로운 미술 사조인 '인상주의(사람·사물·자연 등에 대한 화가의 순간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을 표현하고자 한 미술 운동)'를 탄생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해가 저물녘 풍경을 그린 〈작품4〉에는 혁신적 터너 화풍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요. 이 그림 속 다리, 건물, 나무, 해는 정확한 형태로 그려지지 않고 윤곽선도 흐릿해요. 놀랍게도 당시 전통적 그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햇빛, 안개, 비, 증기 등 자연현상이 표현되었어요.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
다른 화가들이 화실에서 풍경화를 그리던 시절, 터너는 바깥에 나가 자연현상을 직접 관찰하고 대기의 변화까지도 생생하게 풍경화에 담았어요. 터너표 풍경화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에게도 영감을 주었어요. 인상주의 탄생을 알리는 모네의 대표작 '일출'(1872년)과 이 그림을 비교해보면 터너가 모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터너의 그림은 영국이 위대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요. 또 인상주의 선구자라는 미술사적 업적도 남겼어요. 그래서 영국의 국민 화가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거랍니다.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