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살리에리, 베토벤·슈베르트 가르친 당대 최고 스승이었죠
입력 : 2018.05.12 03:00
[음악가의 스승]
명음악가 뒤엔 그를 키운 스승 있어
백건우·한동일 키운 로지나 레빈… 20세기 최고 피아노 교수로 꼽혀요
정경화 스승은 스파르타式으로 유명
며칠 있으면 '스승의날'입니다. 각자 하는 일이 다르고 사는 환경도 같지 않지만, 누구나 고마운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은 마음속에 있게 마련이지요. 특히 클래식 분야는 스승과 학생이 일대일 개인 교습을 하거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 사제(師弟) 간 관계가 더 친근하고 특별하답니다. 스승의 성장 과정이나 개인적 경험이 학생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지요. 오늘은 다양한 삶을 통해 제자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달했던 스승 네 사람을 소개할게요.
- ▲ 이탈리아 출신 명교육자였던 안토니오 살리에리. /위키피디아
살리에리는 슈베르트도 가르쳤는데, 당시 일곱 살에 불과한 어린 제자가 뛰어난 음악성을 갖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빈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직접 주선했어요. 또 슈베르트가 성인이 된 후에도 작품을 계속 살펴보며 꾸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요.
그뿐만 아니라 천재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를 직접 가르치기도 했답니다. 작곡이 작곡가 개인의 생각과 개성을 마음껏 뽐내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살리에리는 제자 개개인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한껏 키워주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갖춘 스승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러시아에서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는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쇼팽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로 손꼽혀요. 정명훈, 손열음, 조성진 등 우리나라 출신 입상자들도 많아 친근한 대회가 되었어요.
미국과 소련이 사사건건 대결을 펼치던 냉전(冷戰) 시대인 1958년 처음 시작된 이 대회 피아노 부문 첫 우승자는 미국 텍사스 출신 젊은 연주자 밴 클라이번(Cliburn·1934~2013)이었어요. 당시 소련이 개최한 음악 경연 대회에서 미국인이 우승한 것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이변이었지요. 그래서 그런 클라이번을 가르친 스승도 큰 화제가 되었는데, 미국 줄리아드 음악 학교에서 클라이번을 지도한 러시아 출신의 로지나 레빈(Lhevinne·1880~1976)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남편 요세프 레빈과 함께 1차 세계대전(1914~1918) 후 미국으로 이주했어요. 남편 요세프가 1944년 세상을 떠나자 로지나는 줄리아드 음악 학교와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음악대 등에서 꾸준히 학생들을 가르치며 20세기 최고의 명교수 중 한 사람이 되었지요.
그는 피아니스트뿐 아니라 지휘자, 작곡가 등도 많이 길러냈는데요. 그의 문하(門下·스승의 가르침 아래)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한동일, 백건우 등도 있답니다. 백건우는 언론 인터뷰에서 스승 로지나에 대해 "그는 나를 자식처럼 대해 주었다. 곡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기 사생활에 대해 자주 말했다. 내 정신 상태 등 여러 가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내 연주와 연결시켜 나에게 맞는 연주가 나오게끔 가르친 것이다"라고 회상하기도 했어요.
줄리아드 음악 학교에서 오랫동안 바이올린 교수로 일하며 수많은 명연주자를 배출한 또 다른 스승은 이반 갈라미언(Galamian·1903~1981)입니다. 이란에서 태어난 그는 20대 초반부터 선생으로 활약했어요. 러시아를 거쳐 1937년 미국으로 자리를 옮긴 갈라미언은 줄리아드 음악 학교와 메도마운트 음악 학교 등에서 많은 학생을 가르쳤는데요. 지독하게 연습만을 강조하며 제자들을 몰아치고 독촉하는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한 스승이었답니다. 그의 가르침 아래 이츠하크 펄먼, 정경화, 강동석, 핀커스 주커만, 조슈아 벨 등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탄생했지요. 정경화는 갈라미언을 떠올리며 "선생님은 내게 '네가 음악을 계속하려면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내가 힘들다고 불평할 때마다 '인내하라'고 해주신 고마운 분"이라고 말했어요.
- ▲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슈타커가 마스터 클래스(유명한 음악가가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에서 제자들에게 연주를 선보이고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러나 그의 앞날은 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가로막혔는데요. 전쟁이 끝나기 직전 슈타커의 두 형이 독일 나치스에 살해당하는 불행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종전(終戰) 후 전기공과 광부로 일했던 슈타커는 1947년 파리에서 활동을 재개했고 1년 후 미국으로 이주해 댈러스 심포니 수석단원을 거쳐 첼로 독주자로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음반 150여 개를 낸 명첼리스트 슈타커의 또 다른 면모는 선생님으로서 모습이었어요. 1958년부터 미국 인디애나대 교수로 일한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빈틈없는 기교와 명확한 해석으로 이름났던 연주처럼, 슈타커는 학생들에게 매우 혹독한 훈련을 요구하는 '호랑이 선생님'이었어요.
그는 연주와 교육 활동을 병행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가르칠 수 없다면 연주할 수 없고, 연주할 수 없다면 가르칠 수도 없다. 학생에게 내가 연주하는 방식을 가르치려면 나 스스로 어떤 연주를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마다 다른 분야에서 제자를 길러냈지만, 더 좋은 가르침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았던 스승들의 모습이 참으로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