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마오쩌둥 말 믿고 비판 했다가… 55만명 우파로 낙인찍혀

입력 : 2018.05.04 03:06

[마오쩌둥과 반(反)우파 투쟁]

1956년 마오 "마음껏 비판하라" 선언
막상 공산당 독재 비난 봇물 터지자 반대 인물들 '우파'로 몰아서 탄압해
中 정부, 비판 여론 경계하는 이유죠

최근 중국 정부가 약 3억명의 젊은이가 이용하는 유머 동영상 공유 애플리케이션(앱) '네이한돤쯔'를 '사회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전격 폐쇄했어요. 이에 반발한 중국인들이 전역에서 기습적인 차량 시위를 벌였다고 해요.

얼마 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의 임기 제한을 철폐한 이후 중국 당국은 인터넷에서 시진핑 주석의 연임을 반대하는 각종 단어를 차단하고 있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유머 동영상 폐쇄 사태도 '중국 정부가 비판 여론을 감시하기 위해 사회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경직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중국은 왜 이토록 비판 여론이 생기는 것을 경계하는 것일까요?

◇공산당의 자신감 표출, '쌍백운동'

1949년 마오쩌둥(1893~1976)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훗날 대만 최고 지도자)가 이끄는 국민당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중국 본토를 통일했어요.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해 세계를 놀라게 했죠. 마오쩌둥은 토지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갖추고, 한국전쟁 참전으로 내부 결속을 다져 공산당 지배를 확고히 했어요.

자신감에 취한 마오쩌둥은 1956년 '백화제방·백가쟁명'을 표방하며 대중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특히 공산당에 대한 비판까지 수용하겠다는 선언을 했어요. 누구든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뜻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 중국에서 활약한 여러 학자와 학파)가 활약했던 춘추전국시대처럼 '문화적 황금기'를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된 선언이었어요. 이를 두고 맨 앞에 '백(百)'자가 두 개 들어갔다고 해서 '쌍백(雙百) 운동'이라 부르기도 하고, 마지막 두 글자를 결합해 '명방(鳴放) 운동'이라 부르기도 해요.

자유로운 토론을 보장해주었지만 지식인들은 선뜻 나서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어요. 그러자 마오쩌둥은 '말하는 자는 죄가 없으며, 듣는 자는 반성해야 한다'며 공산당을 적극 비판해달라고 호소했지요. 이에 지식인들의 공산당 비판이 시작되었고, 당에 대한 불만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어요. 이들을 공산당에 맞서 민주주의를 추구했다는 뜻에서 '민주당파'라고 해요.

쌍백운동 당시 공산당 비판에 앞장섰던 장보쥔이 우파로 몰려 군중으로부터 공개 비판을 받고 있어요.
쌍백운동 당시 공산당 비판에 앞장섰던 장보쥔이 우파로 몰려 군중으로부터 공개 비판을 받고 있어요. /그린비출판사

통렬한 비판 의견으로 대중에게 환호를 받았던 대표적 인물이 저안평과 장보쥔이었어요. 저안평은 한 신문사의 편집장이었는데 '천하가 중국 공산당의 것인 양 당의 천하가 되고 있다'고 말했고, 교통부장이었던 장보쥔은 '공산당 일당(一黨) 독재를 그만두고 양당제(兩黨制)를 기본으로 하는 정당 정치 체제로 바꾸자'고 주장했어요.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민주당파는 수십만 명 규모의 정치 조직으로 발전했지요.

쌍백운동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갔어요. 민주당파는 마오쩌둥을 '살인마'로, 인민 민주주의를 '무뢰한의 독재'로 부르며 길거리 시위를 벌였어요. 그런가 하면 중부 후베이성에서는 1000여 명의 민주당파 학생이 공산당과 지방 정부를 습격하는 사건도 발생했어요. 쌍백운동을 적극 추진했던 마오쩌둥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요.

◇공산당의 반격, '반우파 투쟁'

1957년 6월 공산당은 기관지인 인민일보에 '민주당파는 우파(右派·좌파의 반댓말로 보통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단체 등을 말함) 분자'라고 하면서 이들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어요. 공산당의 반격, '반(反)우파 투쟁'의 신호탄이었죠. 이로 인해 사회주의 문화 정책인 쌍백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부르주아(자본가) 우파로 몰려 공격의 대상이 됐어요.

가장 먼저 공격받은 것은 유명 여류 작가 딩링(1904~1986)이었어요. 딩링은 공산당에서 제명당했고,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일 수 없게 되었지요. 이후 우파 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도 불가능해졌어요. 직장에서 쫓겨나고 노동 교육을 강요받았으며, 농촌으로 추방되는 등 갖은 탄압을 받았지요.

1957년 반우파 투쟁을 외치는 행렬 모습.
1957년 반우파 투쟁을 외치는 행렬 모습. /위키피디아

1958년 7월까지 1년여에 걸쳐 지속된 반우파 투쟁의 결과 공산당의 고위 간부와 당원 작가, 예술가 등 7000여 명이 우파로 지목돼 당에서 쫓겨났어요. 당원들과 공산주의 청년단은 "우파가 전 인구의 5%쯤 된다"는 마오쩌둥의 말에 따라 모든 조직에서 5%의 인원을 뽑아내 추방하는 일을 벌였죠. 그 결과 55만여 명이 우파로 낙인찍혔어요.

당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서슴없이 공산당 비판에 나섰던 사람들은 반체제(反體制) 인사를 색출해내는 유인책에 걸려들었다며 통탄했어요. 이들은 덩샤오핑(1904~1997)이 집권하는 1970년대 복권(復權·한 번 상실한 권세를 다시 찾음)될 때까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죠.

이후 중국인들은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침묵하거나 공산당이 주도하는 정책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시작했어요. 이는 중국의 정치 발전이 늦어지는 걸림돌이 되었죠. 더불어 권력자들은 정권에 대한 비판을 허용했을 때 감당하기 힘들 만큼 큰 역풍이 불어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졌어요.

유머 동영상 앱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폐쇄까지 한 걸 보면 아직 중국의 정치적 자유만큼은 60년 전 마오쩌둥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인류 역사는 모든 대중에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지요. 중국 정부는 과연 언제까지 이러한 역사의 보편적 흐름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춘추전국시대에는 10여 개의 제후국이 저마다 부국강병(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함)을 외치며 널리 인재를 등용했어요. 수많은 사상가와 학자가 다양한 의견을 쏟아냈고(백화제방), 유가·법가·도가 등 다양한 학파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어요(백가쟁명). 이를 두고 ‘온갖 꽃이 피고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주장을 편다’는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지요.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