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선조 피란 갈 때, 주민들 널빤지문 다리 만들어 도왔대요

입력 : 2018.05.02 03:05

[판문점의 유래]

최근 남북 정상회담 열린 판문점 '널빤지 문 마을' 널문리서 유래했죠
임진왜란 때 선조, 의주로 피란 가고 세자 광해군이 별도 조정 이끌었어요

지난 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려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어요. 판문점은 우리나라와 북한이 공동으로 경비하는 특수 구역이지요. 앞서 2000년·2007년 남북 정상회담은 모두 평양에서 열렸는데, 이번에는 판문점 우리 측 구역인 '평화의집'에서 열린 거예요.

판문점은 남북 분단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장소예요. 1953년 7월 27일 당시 38도선에서 가장 가까운 널문리 마을에서 휴전(休戰)협정을 맺었는데, 이 마을이 훗날 한자어인 '판문점(板門店)'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요. 그런데 널문리 마을이란 이름 속엔 우리 역사의 가슴 아픈 장면이 전해져 온답니다.

◇선조, 피란길에 나서다

판문점의 원래 이름인 널문리는 '널빤지로 만든 문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에요. 임진왜란 때 벌어진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피란과 얽힌 전설이 있지요.

1592년 4월, 대규모 함대를 동원해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부산 앞바다에 상륙해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키며 파죽지세(破竹之勢·대나무를 쪼개듯 적을 거침없이 물리치는 기세)로 북쪽을 향했어요. 선조는 일본군의 공세를 당시 뛰어난 명장(名將·이름난 장수)이었던 신립 장군이 막아줄 것이라 기대했지요. 하지만 신립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충주의 탄금대에서 크게 패했고, 일본군은 임금이 있는 한양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어요.

신립 장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그날 밤 난리를 피해 궁궐이 아닌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는 파천(播遷)을 결정합니다. 억수같이 내리는 새벽 비를 뚫고 신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선조는 피란길에 올랐어요. 선조의 피란길은 한양에서 파주, 개성, 평양을 거쳐 압록강 인근 의주로 이어졌는데, 이를 '의주길'이라고 해요.

◇강 앞에서 발만 구르다

궁궐과 도성을 빠져나온 선조 일행은 벽제를 거쳐 얼마 뒤 임진강 나루에 이르렀어요. 그러나 세찬 빗줄기와 칠흑 같은 어두움 때문에 행렬은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했지요. 선조실록 등에 따르면 신하들이 주변에 있던 재목(材木·목조 건축물에 쓰는 나무)에 불을 지르고 강을 밝혀 간신히 임금 일행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고 해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정서용

그런데 사실 신하들이 불을 지른 건 주변 재목이 아니라 정자(亭子)라는 전설이 전해져요. 이 정자의 이름은 '화석정(花石亭)'으로, 1443년(세종 25년) 율곡 이이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세운 것이지요.

설화에 따르면 이이(1536~1584)는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에게 "화석정 기둥과 바닥에 수시로 기름칠을 잘 해두면 반드시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이의 예언처럼 약 8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선조 행렬이 임진나루에 도착했을 때 신하인 이항복이 화석정을 발견해 불을 질렀다는 거예요. 평소 기름칠을 잘 해둔 정자는 순식간에 활활 타올라 나루 일대를 대낮처럼 밝혔지요.

◇순박한 백성들의 애국심이 깃든 곳

간신히 강을 건넌 선조 일행은 파주 동파역에 이르렀어요. 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 개성으로 향했는데요. 여기에 인근 마을 널문리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요.

선조 행렬을 다시 강이 가로막았고 배도 한 척 보이지 않았어요. 신하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지요.

"떵떵" "떵떵" "떵떵" 그때 마을에서 뭔가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문짝을 등에 인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강가로 나타났지요. "전하, 저희가 지금 다리를 만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자기 집 널빤지 대문을 뜯어온 백성들은 빠르게 그것들을 이어 다리를 놓았다고 해요.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선조 임금은 무사히 강을 건너 개성에 도착할 수 있었답니다. 그 뒤로 이 마을을 '널문리'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수백 년이 흘러 1953년 휴전협정 때는 이 마을에 주막을 겸한 상점인 '널문리 가게'에서 서명식이 열렸어요. 이처럼 나라가 위태로울 때 임금의 안위를 걱정했던 백성들의 순박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판문점이 앞으로 세계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어요.

☞둘로 나뉜 조정

선조 일행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어요. 왕은 그러면서 “만약 나와 세자가 함께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가면 나라에 임금이 없게 된다”며 세자인 광해군에게 본국에 머물며 조정을 이끌게 했어요. 조선은 선조를 따르는 신하들로 이루어진 조정과 광해군을 따르는 신하들로 이루어진 조정으로 나뉘었답니다. 광해군이 이끈 조정을 ‘분조(分朝)’라 해요.

광해군은 이후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에서 분조를 이끌며 의병들을 격려했어요. 선조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과 의병들의 활약, 명나라 참전 등으로 전세가 바뀌자 피란 1년 6개월 만에 한양에 돌아왔지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