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빛·어둠 대조해 생동감 표현… '네덜란드 황금시대' 그렸죠

입력 : 2018.04.28 03:00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17세기 무역으로 부강해진 네덜란드, 귀족 대신 부자 상인이 작품 주문
렘브란트, '황금시대' 대표 화가죠… 내면 탐구하는 초상화 100여점 남겨

유럽 북서부에 있는 네덜란드는 아름다운 튤립과 풍차의 나라로 유명합니다. 네덜란드의 지형은 특이해요. 국토의 25%가 해수면(바닷물 표면)보다 낮아요. 전국 곳곳에 둑을 쌓고 수로(水路·물길)를 만든 것도 바닷물과 강물이 육지로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같이 불리한 지형과 천연자원이 부족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네덜란드인들은 일찍부터 바다로 나가 국제무역을 했어요. 17세기에는 스페인, 포르투갈에 이어 전 세계 바다를 지배한 해양 강국이 되었어요. 국제무역과 조선업, 상업으로 엄청나게 부유해진 네덜란드에선 예술과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했지요. 경제·예술·과학기술이 찬란하게 꽃피웠던 이 시절을 '네덜란드 황금시대'라고 부릅니다.

사진1 - 렘브란트 광장과 렘브란트 동상.
사진1 - 렘브란트 광장과 렘브란트 동상.

당시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더욱 빛낸 화가가 있었어요. 바로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 레인(Rembrandt·1606~1669)이에요. 네덜란드는 영광스러운 이 화가를 기념하기 위해 렘브란트 이름을 딴 광장을 만들었고 렘브란트 동상도 세웠어요(사진1).

렘브란트 동상 앞에 서 있는 여러 인물 조각상은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간 순찰'에 등장하는 시민군을 표현한 거예요. 수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원작을 감상하면서 렘브란트가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위인이 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도록 해요.

작품1 - 렘브란트 판 레인, 야간 순찰, 1642년.
작품1 - 렘브란트 판 레인, 야간 순찰, 1642년.

〈작품1〉은 시민 군대인 사수부대원들이 암스테르담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을 그린 거예요. 대장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가 이끄는 암스테르담 사수협회(射手協會)는 시청 건물을 장식할 자신들의 단체 초상화를 유명 화가인 렘브란트에게 주문했어요. 사수협회 초상화를 주문받는 일은 렘브란트에게 대단한 영광이었어요. 사수협회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화가에게 단체 초상화를 주문하는 전통이 있었거든요. 귀족과 상인들로 구성된 사수부대는 암스테르담의 법과 질서를 책임진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사수부대원들은 명예와 권위를 과시하려는 홍보용 목적으로 돈을 모아 단체 초상화를 주문했지요.

이 그림은 시민군의 행진을 다양한 의상과 동작,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명암법(키아로스쿠로 기법)으로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어요. 당시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고, 가장 먼저 도시화가 이뤄진 나라였다는 사실을 증명해요. 아울러 국제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인 암스테르담 치안을 시민들로 이뤄진 군사 조직이 책임졌다는 정보도 알려줍니다.

작품2 - 렘브란트 판 레인, 암스테르담 직물 제조 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 1662년.
작품2 - 렘브란트 판 레인, 암스테르담 직물 제조 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 1662년.

암스테르담 직물 조합 이사들을 그린 〈작품2〉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미술이 화려하게 꽃피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초상화 속 검은 옷과 검은 모자를 쓰고 앉아있는 다섯 남자는 상인 계급입니다. 뒤에 서 있는 남자는 관리인이고요. 왜 포목(베와 무명) 상인 대표들이 집단 초상화에 등장했을까요?

이들은 그림을 주문한 고객이었어요. 당시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왕과 귀족들이 초상화의 주요 고객이었지만 네덜란드는 대체로 부유한 상인들이 초상화를 주문했어요. 해상무역과 금융거래로 큰돈을 번 상인들은 건물이나 집을 초상화로 장식하고 싶은 욕망을 가졌거든요.

특이하게도 네덜란드에서는 화폭에 한 사람이 등장하는 개인 초상화보다 여러 인물이 그려진 집단 초상화가 더 인기가 높았어요. 유럽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문화 현상이었지요. 집단 초상화는 미술품 시장을 크게 발전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어요. 경제 발전이 미술품 소비를 늘리며 초상화의 주요 고객이 시민 계급인 상인들로까지 확대됐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작품3 - 렘브란트 판 레인,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 1663~1665년.
작품3 - 렘브란트 판 레인,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 1663~1665년.
렘브란트가 50대 후반에 화실에서 작업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3〉에서는 개인의 경험과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17세기 네덜란드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어요. 작업용 흰 모자를 쓰고 붉은색 옷 위에 모피 코트를 걸친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리다가 관객을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로 유명해요. 22세 때 처음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넘게 자화상 80~100여 점을 그렸어요. 렘브란트는 왜 자화상을 그토록 많이 그렸을까요? 자신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을 탐구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렘브란트 자화상을 그림 일기, 그림으로 그린 자서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학자들은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유럽 다른 나라 국민과 달리 사상과 신앙,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누렸다고 말해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적인 사회 분위기는 렘브란트에게 영향을 미쳐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자화상을 많이 그리는 배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가장 영광스럽고 화려했던 17세기 황금시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렘브란트와 그의 작품들은 네덜란드 국민의 자부심 그 자체랍니다.



이명옥·사비나미술관장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