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돼지 몸에 카펫… 이질적인 것 결합해 새 조화 만들어요

입력 : 2018.03.24 03:08

[빔 델보예展]

공산품에 수공예 결합시킨 델보예
공사용 삽에 정교한 조각 새겨넣고 콘크리트 믹서는 신전처럼 묘사했죠
교회 바닥에 햄을 깐 파격도 눈길

공장 기계로 찍어낸 제품도 예술품이 될 수 있을까요? 대량으로 똑같은 물건을 생산하기 시작한 초기 산업화 시대 사람들은 예술이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했어요. 제품을 사서 쓰는 게 워낙 편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점점 손으로 물건을 만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19세기 영국의 사상가이자 디자이너였던 윌리엄 모리스(1834~1896)는 '장인(匠人) 정신의 부활'을 주장했어요. '장인 정신'이란 손을 활용한 기술에 정통해 그 분야에 대한 뛰어난 안목과 철저한 직업 정신을 갖는 것을 말해요. 모리스는 공산품은 예술품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고, 예술적인 삶을 즐기려면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마음으로 그 아름다움을 느끼며 손으로 그것을 직접 표현해야 한다고 믿었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쯤 뒤 모리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프랑스 예술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이 공장에서 제작한 기성품(레디메이드·ready-made)에 자기 서명을 한 후 전시장에 갖다 놓았어요. 그리고 이것도 엄연히 예술품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세상에 던지는 기발한 생각, 즉 '아이디어'가 예술의 핵심이라는 것이었지요.

오늘날에는 장인 정신과 아이디어 중 무엇이 예술에 있어 더 중요한 가치일까요? 벨기에 출신 예술가 빔 델보예(Delvoye·53)의 작품은 그 둘 사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델보예는 공산품에 수공예를 결합시킨 새로운 개념의 예술을 선보였어요. 신선한 아이디어와 세밀한 아름다움을 모두 다 갖춘 그의 작품은 2012년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됐을 정도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답니다. 우리나라에는 서울 종로구 '갤러리 현대'에서 처음으로 소개됩니다. 오는 4월 8일까지 전시를 볼 수 있어요.

작품1 - 빔 델보예, ‘무늬를 새긴 삽(Engraved Shovels)’, 2016년.
작품1 - 빔 델보예, ‘무늬를 새긴 삽(Engraved Shovels)’, 2016년. /갤러리 현대, ‘빔 델보예’展

작품1은 삽이에요. 어디에서나 똑같은 제품을 살 수 있다고 알려주듯 바코드가 찍힌 가격표까지 그대로 붙어 있는 삽이랍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삽의 움푹한 금속면 위에 아주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네요. 옛 귀족의 식탁 위에 놓여 있음 직한 값비싼 은그릇과 은촛대에서 본 것 같은 고풍스러운 식물 장식이에요. 험하게 흙과 자갈을 파내는 삽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급스러운 금속 공예품과 노동을 위한 거친 도구가 결합한 또 다른 예를 볼까요? 작품2는 제목이 '콘크리트 믹서(mixer)'입니다. 건설 현장에서 시멘트와 자갈을 섞는 기구인 콘크리트 믹서는 사실 이렇게 공을 들여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작동만 잘 되면 될 뿐 아무도 이런 물건에서 특별한 아름다움을 기대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델보예는 중세 교회 건축의 세부 장식 느낌을 그대로 가져와서 이 기구를 마치 성스러운 신전(神殿)처럼 보이도록 만듭니다. 이 작품 역시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기분이 드는군요.

작품2 - 빔 델보예, ‘콘크리트 믹서’, 2013년(사진 왼쪽). 작품3 - 빔 델보예, ‘대리석 바닥 #9’, 2010년(사진 오른쪽).
작품2 - 빔 델보예, ‘콘크리트 믹서’, 2013년(사진 왼쪽). 작품3 - 빔 델보예, ‘대리석 바닥 #9’, 2010년(사진 오른쪽). /갤러리 현대, ‘빔 델보예’展

작품3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닥의 기하학적인 패턴을 찍은 사진인데요. 언뜻 보기에는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으로 만든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햄과 살라미(얇게 썬 이탈리아 소시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음식물이 펼쳐진 바닥을 발로 밟고 지나가라는 뜻일까요? 어떻게 보면 가벼운 농담 같기도 하고, 또 달리 보면 심각한 반항 같기도 합니다.

작품4 - 빔 델보예, ‘타브리즈(Tabriz)’, 2010년.
작품4 - 빔 델보예, ‘타브리즈(Tabriz)’, 2010년. /갤러리 현대, ‘빔 델보예’展
작품4는 돼지의 모형을 페르시안 스타일 카펫으로 씌운 것인데요. 원래는 분홍빛 살가죽을 가진 돼지였을 텐데 이렇게 알록달록한 카펫 무늬 피부로 변해버리니, 도무지 무슨 동물인지 알 수 없게 돼버렸네요. 이슬람교도라면 이 작품을 더욱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볼지 모르지요. 기도를 할 때 바닥에 까는 성스러운 용도의 카펫이 하필이면 자신들이 종교적 이유로 기피하는 돼지고기와 결합한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

물론 델보예가 특정 종교를 모독하려는 것은 아니랍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타브리즈'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타브리즈는 이란 북서쪽 지역 이름인데, 예로부터 동·서양 간 상업 교류가 활발했고 그와 함께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만났던 장소입니다. 아마도 그곳에서는 익숙하지 않고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일상이었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몰라요.

평범한 공산품에 금속 공예를 하고, 건설 장비에 교회 장식을 하는가 하면, 대리석 대신 햄을 바닥에 깔고, 돼지 몸에 카펫 피부를 입히는 등 델보예의 작품 속에는 도통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습니다. 대립되거나 모순되는 요소들을 결합해 전혀 새로운 조화와 색다른 의미를 창조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델보예가 추구하는 예술이랍니다.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