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드레퓌스 진실 덮는다" 폭로… 19세기 프랑스 뒤흔들었죠
입력 : 2018.03.08 03:09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反독일·反유대주의 판치던 프랑스… '유대인' 드레퓌스 간첩으로 몰았죠
에밀 졸라, 국가 권력의 횡포 고발… 개인 권리 지키려고 용기있게 고백
지난해 미국의 영화 제작자 와인스틴의 성폭력 사건을 폭로하면서 시작된 '미투 운동'(소셜 미디어에 '#Me too'를 다는 캠페인)의 불길이 거세게 일고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정치권과 법조계, 문화계, 학계 등을 중심으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지요.
미투 운동은 여성이 자기보다 사회적 권력이 높은 남성으로부터 당한 폭력을 용기 있게 폭로하는 운동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도 있었는데, 국가 권력으로부터 개인이 받았던 억압과 피해를 고발했던 사건이었지요. 소셜 미디어가 없던 그때 어떻게 이런 고발을 할 수 있었는지 120여 년 전 프랑스로 떠나볼게요.
◇만들어진 반역자, 드레퓌스
1870년 여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의 조카)가 프로이센(훗날의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어요. 하지만 전쟁 시작 두 달 만에 프랑스 주력군은 전멸당했고, 나폴레옹 3세는 적국의 포로로 붙잡혔지요. 프로이센은 파리를 점령하고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했어요.
미투 운동은 여성이 자기보다 사회적 권력이 높은 남성으로부터 당한 폭력을 용기 있게 폭로하는 운동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도 있었는데, 국가 권력으로부터 개인이 받았던 억압과 피해를 고발했던 사건이었지요. 소셜 미디어가 없던 그때 어떻게 이런 고발을 할 수 있었는지 120여 년 전 프랑스로 떠나볼게요.
◇만들어진 반역자, 드레퓌스
1870년 여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의 조카)가 프로이센(훗날의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어요. 하지만 전쟁 시작 두 달 만에 프랑스 주력군은 전멸당했고, 나폴레옹 3세는 적국의 포로로 붙잡혔지요. 프로이센은 파리를 점령하고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했어요.
- ▲ 1898년 앙리 드 그루가 그린 작품‘군중에 둘러싸인 졸라’. /위키피디아
그 무렵 프랑스 사회는 유대인이 연루된 거대한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반(反)유대인 정서가 매우 높았어요. 유대인이던 드레퓌스는 많은 차별 대우를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엘리트 군인으로 성장해 프랑스군 참모본부에 들어갔지요. 1894년 9월 프랑스군 참모본부는 독일군 정보요원이 수신인(편지를 받는 사람)으로 지정된 문서를 하나 입수합니다. 문서에는 프랑스군의 대포 설계도면, 주요 부대의 배치도 등 각종 군사기밀이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었죠. 충격을 받은 참모본부는 중요한 정보를 적에게 빼돌린 반역자를 색출하기 위해 포병 장교들을 대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군 당국은 드레퓌스를 유력한 혐의자로 지목했어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DNA나 지문 감식 같은 과학적 조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용의자를 색출하는 방식은 필적(손수 쓴 글씨체)을 대조하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지요. 드레퓌스는 기밀문서를 작성한 사람과 글씨체가 비슷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지만, 독일 땅이 된 알자스 지방 출신이라는 점과 돈을 밝히는 유대인이라는 편견이 덧씌워져 군사재판을 받게 됐어요.
- ▲ 프랑스 신문에 실린 에밀 졸라의‘나는 고발한다’.
재판정에서 검사는 조작된 증거들을 제시했어요. 드레퓌스는 무죄임을 주장했지만 무시당했고, 군에서의 모든 계급을 박탈당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리고 1895년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악마의 섬'에 수감되었어요.
드레퓌스가 유배를 간 뒤, 군사기밀을 팔아넘기려 한 진범이 '에스테라지'라는 보병 장교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어요. 이를 확인한 군 관계자가 상부에 다시 재판을 해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군 당국은 오히려 그 관계자를 식민지로 발령내고 좌천시켰답니다. 그리고 진범 에스테라지가 군사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되는 일까지 벌어졌지요.
◇프랑스를 뒤흔든 '나는 고발한다'
1898년 1월 13일, 파리의 일간지 '여명' 1면에 한 지식인이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가 실립니다. 기고자는 프랑스 국민에게 사랑받는 소설가인 '에밀 졸라'(1840~1902)였어요.
그는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드레퓌스가 무죄이며, 진실을 덮으려는 프랑스군을 '범죄 집단'이라고 비난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다. 내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내가 보낼 밤들은 무고한 사람들의 유령이 가득한 밤이 될 것"이라고 했지요. 이 글로 인해 졸라는 국방부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결국 영국으로 망명을 가는 신세가 됐어요.
그러나 '나는 고발한다'의 파장은 엄청났어요. 진보적 언론과 지식인들은 드레퓌스가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의 재심에 찬성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고, 국가의 이익과 개인의 권리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어요.
1899년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게 됐지만, 증인으로 출석한 군 수뇌부는 여전히 그가 유죄임을 주장했어요. 전 국방부 장관 메르시에는 "드높은 명예를 지닌 나와, 관용을 베풀어주어 이 자리까지 온 유대인 중 누가 죄인인지 결정하라"며 법정을 압박했지요. 결국 드레퓌스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국내외 여론은 다시 끓어올랐어요.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는 "수치스럽고 비관적이며 구역질 나는 야만적 판결"이라고 보도했고, 에밀 졸라도 다시 펜을 들어 여론을 주도해나갔죠.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이 국가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죄 선고 10일 만에 드레퓌스를 특별사면합니다. 수많은 인사가 '사면을 받아들이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5년간 감옥에 갇혀 쇠약해진 드레퓌스는 정부 제안을 받아들였죠. 사면 후 드레퓌스는 최고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해 1906년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어요. 또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프랑스군에 자원입대해 싸웠지요. 자신이 간첩이 아니라 진정한 애국자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거예요.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에 대해 "언젠가 프랑스는 나라의 명예를 구해준 것에 대해 내게 감사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어요. 이처럼 권력에 맞선 용기 있는 고백은 한 사회를 한발 더 나아가고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에요.
[에밀 졸라는 누구? ]
19세기 프랑스의 문학가예요. 출판사 직원으로 일하다 뒤늦게 작가의 길로 뛰어들었지요. '목로주점' '나나' '제르미날' '인간 짐승' 등이 잇따라 높은 평가를 받으며 유명 작가가 됐고, 프랑스 국가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기도 했어요. 그러나 1898년 '나는 고발한다'로 영국에 망명을 가는 신세가 됐고 이듬해 고국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하던 중 1902년 사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