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처칠, '나치와 타협' 주장에 "스스로 무릎 굽힌 나라는 사라져"

입력 : 2018.03.02 03:11

[처칠과 2차 세계대전]

독일 170만 병력으로 폴란드 침공, 파죽지세로 프랑스 등 서유럽 점령
英 처칠, '전시 내각' 총리에 올라 '獨과 협상' 거부하고 끝내 승리했죠

1943년 런던 다우닝가에서 대중에게 승리의 ‘V(브이) 사인’을 하고 있는 처칠.
1943년 런던 다우닝가에서 대중에게 승리의 ‘V(브이) 사인’을 하고 있는 처칠.

지난해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 '덩케르크'가 인기를 끈 데 이어, 최근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어둠의 시간)'가 개봉해 화제가 됐어요. '덩케르크'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이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돼 있던 연합군 33만8000여 명을 구출해낸 작전을 다뤘다면,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덩케르크 작전을 결정하기 전까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겪었던 고뇌와 복잡한 국제 정치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요.

윈스턴 처칠(Churchill·1874~1965)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영국 총리에 오른 지도자예요. 과감한 승부수와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세계대전을 연합국 승리로 이끌어 '승리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인물 중 한 사람이지요. 오늘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처했던 상황에서 처칠이 선택한 길을 알아볼게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다

1914년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하면서 막을 내렸어요. 1918년 전쟁 후 질서를 위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면서 연합국은 독일에 전쟁 책임을 묻겠다며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떠안겼지요. 잿더미가 된 국토에서 독일 사람들은 빵 하나를 사느라 마르크화(당시 독일 화폐)를 수레 한가득 싣고 가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에 허덕였어요.

독일 국민 사이에선 연합국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어요. 그 안에서 자란 어두운 싹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Hitler·1889~1945)'였지요. 1차 세계대전 당시 일개 상병으로 참전했던 히틀러는 1920년대 나치당 지도자가 되면서 독일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합니다.

독일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공산주의자와 유대인 탓으로 돌린 히틀러는 1932년 7월 치른 총선거에 승리하며 이듬해 총리가 됐어요. 이때부터 그는 극단적 인종주의와 전체주의를 통해 독일 민족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그 힘을 이용해 세계 제패를 꿈꾸기 시작했지요.

당시 영국 체임벌린 총리는 이런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의 일부를 넘기는 내용의 '뮌헨 협정'을 체결하는 등 '유화 정책(appeasement)'을 폈어요. 경제 대공황 여파로 군비를 크게 줄인 상황에서 무력으로 독일과 맞서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이런 양보에도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충격에 휩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었어요.

170만 명을 헤아리는 독일군 병력에 폴란드군은 속수무책이었어요. 슈투카(Stuka) 폭격기를 활용한 공습, 육·공군의 체계적인 전투 수행으로 무장한 독일군은 매우 강력했어요. 여기에 소련이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을 등에 업고 폴란드 동쪽 지역을 침공하면서 폴란드는 함락되고 맙니다.

1940년 11월 14일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고 폐허가 된 코벤트리 대성당을 둘러보고 있는 윈스턴 처칠(맨 앞)과 정부 관계자들 모습.
1940년 11월 14일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고 폐허가 된 코벤트리 대성당을 둘러보고 있는 윈스턴 처칠(맨 앞)과 정부 관계자들 모습. /위키피디아(영국 제국전쟁박물관)

1940년 4월 독일은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침공했어요. 이는 서유럽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는 신호였지요. 결국 체임벌린 총리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거국 내각(여야 정치인을 주요 자리에 임명하는 것)의 수반으로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이 오릅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그가 취임식 때 한 연설은 전쟁을 향한 강한 의지를 보여줬어요.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입니다. (중략)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극악무도한 폭정(暴政)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승리(victory)입니다!"

◇처칠 "나치와 타협하지 않겠다"

당시 독일은 아주 치밀하고 체계적인 서유럽 침공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에 반해 영국과 프랑스는 방어 중심적인 작전만 갖고 있었지요. 독일 낙하산부대와 전차부대는 프랑스 북서부 지역까지 밀고 들어왔고,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고립 상태가 됐어요. 탈출구는 이제 덩케르크밖에 남지 않았어요.

1940년 5월 26일, 처칠은 불가능에 가까운 시나리오처럼 보였던 '덩케르크 작전'을 개시합니다. 민간 선박을 총동원해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을 구출해낸 이 작전은 날씨가 도와주는 천운(天運)을 타고 대성공을 거두었답니다. 덩케르크 작전을 계기로 연합국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지요.

1940년 6월 독일이 프랑스 파리까지 함락하자, 많은 이가 처칠에게 '독일과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실제 히틀러도 7월 영국에 평화 협상을 제의했지요. 영국 전시 내각의 핼리팩스 외무장관도 강하게 타협론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처칠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이런 내용의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어요. "우리에게는 좌절도 패배도 없습니다. 어떤 희생이 따라도 우리 국토를 지킬 것입니다." 처칠은 "싸우다가 지면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스스로 무릎을 굽힌 나라는 없어질 수밖에 없다"며 국민들의 마음을 모으는 데 힘썼지요. 만약 그때 영국이 독일과 타협했다면 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의 승리로 끝났을 가능성도 있었을 거예요.

영국이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자, 히틀러는 공군을 통한 기습 공격을 명령했어요. 하지만 예상 밖으로 이 작전은 실패했고, 본격적인 영국 본토 공격도 연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사이, 처칠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향해 "무기를 우리에게 달라, 그러면 우리가 끝장내겠다"고 호소했어요. 한 달 뒤,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과시키고 영국에 무기를 빌려주기 시작했답니다. 이어 1941년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세는 연합군 우세로 돌아섰지요.

처칠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군인으로 쿠바·인도·수단 등 전 세계 영국 식민지를 돌아다니며 복무했어요. 이후 정치에 입문해 하원의원·식민장관·통상장관 등을 거친 처칠의 삶은 어떤 의미에선 영국 그 자체나 다름없었어요. 그는 훗날 자신의 저서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답니다.

"국가의 안전, 동포의 생명과 자유가 걸린 문제에서 확신이 있을 때는 무력을 사용하는 일을 피하면 안 된다.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는 싸워야 한다."

☞뮌헨 협정

1938년 9월 독일 뮌헨에서 독일 나치스와 영국·프랑스·이탈리아가 맺은 평화 협정. 히틀러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 수데텐란트 영토를 달라고 요구하자, 또 다른 세계대전이 터질 것을 우려한 영국·프랑스 등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설득해 이를 받아들이는 협정을 맺었어요. 히틀러의 야욕을 간파하지 못한 이 협정은 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낳았어요.


 

박세미 기자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