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독일 미술의 아버지'… 판화를 복제품서 예술로 끌어올렸죠

입력 : 2018.02.24 03:07

[알브레히트 뒤러]

독일을 대표하는 '국민 화가' 뒤러, 판화에 예술성 더해 걸작 만들었죠
작품 가치 보증하는 서명 처음 사용… 예수처럼 그린 자화상도 유명해요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여러분은 조국을 빛낸 예술가를 얼마나 알고 있나요? 각 나라마다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예술가들이 있어요. 미술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국보급 예술가를 '국민 화가'로 부릅니다. 국민 화가 중 세계 미술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예술가들을 선정해 업적과 생애, 작품 세계, 후대에 미친 영향 등을 소개하려고 해요.

첫 번째 순서는 '독일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Dürer·1471~1528)입니다. 독일인들은 독일 미술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린 뒤러를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하고 있어요.

2002년 유럽 단일 화폐 유로(Euro)가 통용되기 이전에 독일이 사용했던 옛 5마르크, 20마르크 화폐에는 뒤러 작품〈사진1〉이 새겨져 있었어요. 또 뒤러의 고향 바이에른주 뉘른베르크에는 뒤러 이름을 딴 광장과 동상〈사진2〉이 있지요. 뒤러가 살았던 집은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답니다.

뒤러는 어떻게 독일을 대표하는 국민 화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먼저 목판화(나무판에 새겨서 찍은 그림)와 동판화(구리판에 새겨서 찍은 그림) 분야에서 당대 최고 화가였어요. 전 세계에 판화를 보급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했어요.

당시 뒤러의 고향 뉘른베르크는 활판 인쇄와 목판화 제작에서 유럽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상공업 도시였어요. 뒤러는 공방에서 판화 기술을 갈고닦은 후 명장(名匠)이 되었지만 단순한 기술자를 뛰어넘어 예술가로 남고 싶었어요.

그래서 기술에 예술을 더해 복제품인 판화를 예술 작품 수준으로 끌어올렸어요. 당시 독일 미술은 주목받지 못했지만 뒤러의 판화만은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 기술적으로 완벽한 데다 예술성도 높았거든요. 유럽 미술의 중심지인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유명 화가들도 뒤러 판화를 교재로 사용했을 정도였어요.

특히 1498년 펴낸 목판 연작 '성(聖)요한 묵시록'은 판화 역사상 최고 걸작으로 꼽히고 있어요. '묵시록의 네 기사(騎士)'라는 제목의 작품1은 신약성경 '요한 계시록' 내용을 15점의 목판화에 옮긴 연작 중 가장 유명합니다.

사진1,2, 작품1,2
사진1 - 옛 독일 5마르크, 옛 독일 20마르크. 사진2 -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 동상. 작품1 - 알브레히트 뒤러, 묵시록의 네 기사, 1498년, 판화. 작품2 -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년, 목판에 유화.
이 그림에는 세상의 종말과 인류 최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어요. 그림 속 기사 네 명은 각각 전염병, 전쟁, 기근(굶주림),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 판화집의 성공으로 뒤러는 국제적 명성을 자랑하는 화가로 우뚝 서게 되었답니다.

다음으로 뒤러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 분야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그는 최초로 그림의 한 부분이 아닌 독립된 형태의 자화상을 그렸어요. 미술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13세 때 자화상을 그린 최연소 화가이자 자신의 벗은 몸을 그린 최초의 화가라는 진기록도 세웠어요. 그런 이유에서 뒤러는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리지요.

작품2는 뒤러 자화상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힙니다. 이 그림은 자화상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는 찬사를 받고 있어요.

당시 화가는 기술자로 취급받아 신분이 낮았는데도 뒤러는 자신을 신성한 존재로 보이도록 연출했어요. 기독교 그림에 등장하는 예수그리스도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정면을 응시하는 좌우대칭 자세를 취했어요. 값비싼 모피 코트를 걸친 것도 자신은 고귀한 신분의 예술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어요.

이 작품에서 예술가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도 찾아볼 수 있어요. 그림 왼편에 'AD 1500'의 'AD'는 알브레히트 뒤러 이름과 성의 첫 글자를 딴 서명이고, '1500'은 그림을 그린 제작 연도입니다. 뒤러는 자기 작품이 원작임을 증명하고 그 가치를 보증하는 서명을 최초로 디자인해 사용한 화가로도 유명해요. 그림 오른편에 있는 '나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에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로 나의 모습을 그렸다'라고 적힌 라틴어 문구도 뒤러가 자신의 직업을 존중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끝으로 뒤러는 독일 르네상스(14~16세기 서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운동으로 학문이나 예술의 부활·재생이라는 뜻)의 문을 연 선구자였어요. 르네상스를 꽃피운 미술의 중심지인 이탈리아를 두 차례 방문해 원근법(물체와 공간의 가까움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는 방법)과 인체 비례 이론 등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바탕을 둔 미술 이론을 공부했어요.

독일로 돌아와 수학, 기하학, 원근법을 평생에 걸쳐 연구한 후 독일 화가와 조각가, 기술자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혁신적인 미술 이론 책을 펴냈어요. 1527년에 펴낸 '컴퍼스와 자를 이용한 측정술 교본'은 미술뿐 아니라 기하학과 자연과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어요.

뒤러 덕분에 한낱 기능공에 불과하던 화가와 기술자들이 지식과 교양을 갖춘 르네상스 인재로 거듭날 수 있었어요. 20세기 세계적인 미술 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뒤러가 왜 독일을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인지 몇 문장으로 정리해주었어요.

"뒤러는 15세기 독일에서 꽃피운 인쇄술과 판화를 예술의 지위로 올려놓았다. 뒤늦게 르네상스 대열에 합류한 독일은 판화를 통해 미술 대국의 대열에 올라섰는데, 이는 순전히 뒤러 한 사람의 활약에 힘입은 것이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