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용모 빼어난 신라의 젊은이들… 전쟁서 맹활약했죠

입력 : 2018.02.20 03:07

[화랑(花郞)]

신라의 청소년 무예 단체 '화랑'… 대표 '국선'이 화랑·낭도들 이끌었죠

높은 애국심에 백제 계백장군 감탄
김유신 장군도 화랑 출신이었어요

다음 달 경북 경주 송화산 일대에 '경주화랑마을'이 생긴다고 해요. 신라의 화랑(花郞·꽃처럼 아름다운 사내) 문화를 보여주는 체험 공간으로 화랑 정신과 문화를 소개하고 체험하는 각종 전시관을 만든다는 것이지요. 경주의 새로운 관광지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신라의 화랑이 무엇이었기에 이런 문화 공간을 만드는 걸까요?

◇신라의 꽃다운 청춘들

"화랑들이 무예 연마를 하고 있네. 늠름한 모습이야!"

576년 무렵 신라의 도읍지(수도) 경주 남산 기슭에서 무술 연마를 하는 앳된 젊은이들을 보며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어요. 빼어난 외모와 씩씩한 행동을 자랑하던 청년들을 사람들은 '화랑'이라 불렀지요. 신라의 청소년 무예 단체인 화랑도(花郞徒)에 속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었어요.

[뉴스 속의 한국사] 용모 빼어난 신라의 젊은이들… 전쟁서 맹활약했죠
/그림=정서용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역사책인 '삼국사기'는 화랑도를 신라 제24대 진흥왕 때(576년) 처음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그러나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등 다른 책을 보면 이보다 앞선 시기부터 비슷한 청소년 단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답니다. 562년 화랑 사다함이 가야국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기록 등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신라가 세워지기 전 이미 고대 마을에는 10대 소년들을 모아 훈련 등을 하는 느슨한 형태의 청소년 단체가 있었어요. 이를 신라 제23대 법흥왕 때 '풍월도(風月徒)'라 이름 붙인 뒤 기틀을 다졌고, 진흥왕 때 국가적인 청소년 조직으로 정비한 거예요. 신라가 점점 커지면서 국가에서 대규모 병사와 인재가 필요했고, 이를 일찍부터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조직으로 화랑을 꾸렸다고 볼 수 있어요.

당시 화랑의 인기는 꽤 높았던 것으로 보여요. 삼국사기에 '외모가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요. 이를 보면 용모가 빼어난 10대 소년들을 뽑아 화장까지 시켜서 무예를 단련하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화랑을 이끌던 국선

진흥왕은 화랑도를 정식 국가 조직으로 만들면서, 지도자인 화랑을 3~8명 두고 이를 따르는 낭도를 수백~수천명 두었어요. 또 화랑 중 진골 귀족이면서 무예 실력이 출중한 이를 '국선(國仙)'으로 삼아 전체 화랑도를 이끌게 했지요. 보통 15~18세 청소년이면 화랑도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귀족뿐 아니라 일반 평민도 낭도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를 배우고, 도를 닦고 무예를 연마하며, 춤과 음악, 시를 배웠지요. 또 경치 좋은 산과 들을 찾아다니며 신라의 지리와 지역 풍속을 익히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기도 했어요.

화랑들이 교훈으로 삼고 지키려고 노력한 규칙으로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는데요.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인 600년 중국 수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승려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이라는 두 화랑에게 가르친 덕목이에요. 내용은 사군이충(事君以忠·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 사친이효(事親以孝·효도로 어버이를 섬긴다), 교우이신(交友以信·믿음으로 벗을 사귄다), 임전무퇴(臨戰無退·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살생유택(殺生有擇·산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다섯 가지였지요. 원광법사에게서 세속오계를 받은 귀산과 추항은 이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602년 백제와 아막성 전투에서 당당하게 싸우다 사망했지요.

◇나라 사랑을 실천한 젊은이들

많은 화랑이 당시 신라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인 향가(鄕歌)를 짓고 부르는 음악인이기도 했어요. 대표적인 것이 화랑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가 지은 '모죽지랑가', 승려 충담이 화랑 기파랑을 추모하며 지은 '찬기파랑가'이지요.

철저한 교육과 단체 생활로 화랑들의 애국심은 매우 커서, 전쟁이 일어나면 나라를 위해 스스로 전투에 나갔어요.

660년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과 계백 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이 황산벌 전투를 벌였어요. 신라 김흠순 장군의 아들인 화랑 반굴과 김품일 장군의 아들인 화랑 관창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에 뛰어들어 죽음을 맞이하자, 계백 장군은 "신라와는 대적하기가 어렵겠구나. 소년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수들은 어떠하겠는가"라며 감탄했다고 해요.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용감한 행동과 희생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했고, 백제는 패배하고 말았답니다. 당시 황산벌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훗날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 김유신 장군, 그를 보좌하던 김흠순 장군 역시 화랑 출신이었어요.


[화랑의 삶을 기록한 '화랑세기']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겼다."

'화랑세기'에 기록된 화랑에 대한 이야기를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내용이에요. '화랑세기'는 진골 귀족 출신 학자이자 정치가인 김대문이 704년 쓴 책으로 화랑과 낭도들의 삶에 대해 기록하고 있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