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달이 갑자기 사라지는 월식… '천동설' 시대엔 불길한 징조였죠

입력 : 2018.02.15 03:04

[중세 유럽의 개기월식]

개기월식, 원인 몰라 모두 두려워해… 동로마제국 함락 전에도 관찰됐죠
코페르니쿠스·갈릴레이 '지동설'로 명백한 천문 현상으로 밝혀졌어요

지난 1월 31일, 전국 밤하늘에 개기월식(皆旣月蝕)이 펼쳐졌어요. 개기월식은 지구가 태양과 달 사이에 놓여 달이 지구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지는 현상이에요. 부분월식은 달이 지구 그림자에 일부만 가려지는 것을 말하지요.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개기월식을 신기한 우주 쇼로 받아들이지만, 천문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달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해 두려워했답니다.

◇개기월식을 두려워한 사람들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인 고대 그리스 시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에서 월식을 관측하다가 달을 가리는 그림자가 지구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월식을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식하지 않았어요. 아주 기이하고 주술적인 의미로 받아 들였지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붉은 달'이 뜨면 마법과 주술의 여신 헤카테가 저승의 개를 몰고 지상을 돌아다니면서 저주를 퍼뜨린다고 믿었어요. 여기서 말하는 '붉은 달'은 개기월식 때 나타나는 '블러드문(Blood moon·지구에서 달의 색깔이 붉게 보이는 것)' 현상을 말하는 것이에요. 블러드문이 뜨는 날엔 집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해 농사를 망치는 불길한 징조로 여겼지요.

4세기 후반부터 1000년 넘게 이어진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이었어요. 이 도시의 상징은 '달'이었기 때문에 '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지 않는다'고 여겼다고 해요. 그런데 1453년 어느 날, 개기월식이 일어나면서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사라지는 일이 생겼어요. 그로부터 5일 후, 콘스탄티노플은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던 오스만 제국에 함락당했답니다. 결과적으로 개기월식의 전설이 현실로 나타난 것처럼 된 것이지요. 이에 대해 당시 천문학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했던 오스만 제국에서 동로마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블러드문이 뜨는 시기에 맞춰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과학적으로 개기월식이 일어나는 이유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기까지 매우 많은 시간이 걸렸답니다. 많은 자연 현상을 '신의 뜻'으로 설명하던 중세 유럽에 과학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들이었어요.

◇지동설을 주장한 두 과학자

폴란드 상인의 아들이었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며 천문학을 공부했어요. 그는 오랜 연구 끝에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는데요. 여기서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중심에 태양을 놓고, 그 주위에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을 차례차례 배열한 모형을 제시했답니다. 그리고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운동을 하고 있다는 주장(지동설·地動說)을 펼쳤지요.

당시에는 하느님이 창조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별 중의 하나라는 생각(천동설·天動說)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성경에 반하는 혁명적인 내용이었지요. 코페르니쿠스는 이 책의 초판본을 받아본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로마 교황청은 그의 책이 기존 우주 질서를 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해 금서(禁書)로 지정했어요. 독일의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조차도 코페르니쿠스를 '점성술사'라고 깎아내렸지요.

갈릴레이가 관찰해 그린 달의 표면.
갈릴레이가 관찰해 그린 달의 표면. /위키피디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어간 것은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였어요. 피사 지역의 유력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갈릴레이는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피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수학과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어요. 그는 1609년 확대율을 기존 것보다 30배나 높인 망원경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열심히 우주를 관측하면서 달의 표면을 최초로 자세하게 기록했답니다.

'달 표면은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광경 중 하나다. … 표면은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지구 표면과 마찬가지로 어디에나 광대한 돌출부, 깊은 계곡과 만곡부(활처럼 심하게 굽은 부분)가 가득하다.' 1610년 그가 쓴 '별세계의 보고'라는 책에 나온 내용이에요.

갈릴레이는 당시 완전히 매끄러운 구(球)라고 믿었던 달에도 지구처럼 산과 계곡이 있다는 것을 처음 발견했어요. 그리고 이후 목성의 위성들, 토성의 띠, 태양의 흑점 등을 잇따라 관찰하면서 60여 년 전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옳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갈릴레이의 이 같은 활동이 알려지자 로마 교황청은 그에게 경고했어요. 그러나 갈릴레이가 천동설을 반박하고 지동설을 지지하는 활동을 이어가자, 결국 로마 교회는 그에게 이단(異端) 혐의를 씌워 종교 재판정에 세웠지요. 갈릴레이는 1616년 2월 26일,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다시는 지동설을 논하거나 옹호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났어요.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로마 이단 심문소에 불려온 갈릴레이(오른쪽)를 그린 그림.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로마 이단 심문소에 불려온 갈릴레이(오른쪽)를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이때 갈릴레이가 법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요. 나중에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로 판명났지만 그만큼 갈릴레이가 지동설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예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살던 시대에는 눈으로 명백하게 관찰할 수 있는 천문 현상이라도 주류의 지식과 신념에 맞지 않으면 배제당해야 했던 거예요.

우리는 더 이상 개기월식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과거 두려움의 대상이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그것이 과학으로 발전하면서 인류 역사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 것이랍니다.

☞금성(金星)과 지동설

1610년 갈릴레이는 금성의 모양을 망원경으로 관찰했어요. 금성은 마치 달처럼 초승달 모양이 됐다가 반달 모양이 됐다가 보름달 모양이 되는 변화를 계속 보여주었지요. 이는 금성과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기존 ‘천동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어요.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적용하면 금성의 모양 변화가 잘 설명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는 훗날 지동설을 뒷받침해주는 강력한 근거가 됐답니다.





 

이정하·천안 계광중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