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진흥왕 감동시킨 우륵의 가야금 연주… 열두 달 본떠 12줄이죠

입력 : 2018.02.13 03:07

[가야금의 역사]

가실왕, 中의 쟁 본뜬 가야금 만들고 우륵은 곡 만들어 가야금 연주
신라 때 궁중 음악으로 쓰였어요
고구려 왕산악은 6줄 거문고 제작

'가야금 명인(名人)'으로 사랑받아온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어요. 명인이란 특정 분야에서 빼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황병기는 가야금 연주도 빼어났지만'침향무(沈香舞)' '미궁(迷宮)' 등 전통과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진 창작곡을 많이 내놨답니다. 그의 연주에 대해 미국 유력 신문 뉴욕타임스는 "신비로운 영감(靈感)으로 가득한 동양의 수채화 같다"고 평가했지요.

황병기의 가야금 연주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준 것처럼, 약 1500년 전 삼국시대에도 가야금으로 사람들 마음을 움직인 역사 속 인물이 있었어요. 오늘은 가야금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죠.

◇가야금을 만든 가야의 임금

'우리 여섯 가야국이 사이좋게 지낼 방법이 없을까?'

기원 전후 지금의 낙동강 일대에는 금관가야(지금의 경남 김해), 아라가야(경남 함안), 고령가야(경북 함창), 대가야(경북 고령), 성산가야(경북 성주), 소가야(경남 고성) 등 '여섯(六) 가야'가 있었어요. 기원전 수세기 이 지역에 생긴 수십 마을이 차츰 세력을 넓히면서 여섯 소국(小國)인 가야국으로 발전한 것이었죠.

[뉴스 속의 한국사] 진흥왕 감동시킨 우륵의 가야금 연주… 열두 달 본떠 12줄이죠
/그림=정서용
여섯 가야는 가장 먼저 탄생한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다른 가야들이 서로 연맹체를 맺고 있었어요. 이에 한 가야국 임금인 가실왕은 '음악을 통해 여섯 가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자'고 생각했지요. 음악을 무척 좋아했던 가실왕은 중국의 현악기(줄을 튕기거나 그어서 소리 내는 악기) 중 하나인 쟁(箏)을 본떠 새로운 현악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가야금이에요. 줄이 15개 있는 쟁과는 달리 가야금 줄은 12개였는데, 열두 달의 음률(12음률·국악에서 한 옥타브를 12음으로 나눈 것)을 본뜬 것으로 1년 열두 달 모든 가야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자는 뜻을 담았지요. 가야금이란 이름은 가야국에서 만든 금(琴·거문고)이란 뜻에서 붙었답니다.

악기가 완성되자 가실왕은 궁중 악사(연주가) 우륵을 불렀어요. "이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지으시오. 악기 줄이 열둘이니 열두 곡을 지으면 좋을 것이오."

우륵은 가실왕의 명령에 따라 가야금용 음악 12곡을 작곡했고, 노래 제목은 '하가라도' '상가라도' '사물' 등 가야의 주요 지역 이름을 따서 지었어요. 그 뒤 우륵은 제자인 이문과 함께 가야금을 둘러메고 여섯 가야국을 돌며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답니다. 가야 연맹체의 단결을 바라는 가실왕의 뜻을 전하고자 함이었어요.

그러나 가야 연맹체는 가실왕의 바람과는 달리 이웃 나라인 신라·백제처럼 왕이 강력한 힘을 갖춘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했어요. 6세기 초 금관가야를 시작으로 하나둘 신라에 흡수되면서 멸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야금을 받아들인 신라의 임금

551년 3월, 신라 24대 임금 진흥왕이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으로 행차했어요. 왕은 그곳에서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이 음악에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해보라 했지요. 당시 우륵은 가야가 쇠락하자 고향을 떠나 신라 땅에 머물고 있었거든요.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소리를 낸단 말인가? 가야금이란 악기는 정말 신비롭구나!"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자 진흥왕은 크게 감동받았어요. 일부 신하가 "가야는 망한 나라인데 그 음악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반발했지만, 진흥왕은 "음악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라의 다스림과 어지러움은 음악 때문이 아니다"라며 옹호했다고 해요.

진흥왕은 우륵이 만든 음악을 신라의 대악(大樂), 즉 궁중에서 사용하는 음악으로 삼았어요. 또 궁중 사람들을 보내 우륵에게 가야금과 노래, 춤을 배우게 했답니다. 우륵은 그 뒤로도 185곡이나 되는 가야금곡을 지어 우리 역사에 아주 뛰어난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남았어요.

◇거문고를 만든 고구려의 재상

우리 역사 속에는 뛰어난 현악기 연주자가 많았어요. 그중엔 거문고의 왕산악도 있었지요. 왕산악은 4세기 중반 고구려의 재상으로, 중국 진나라 사람이 보낸 현악기인 칠현금을 개량해 줄(현)이 6개인 거문고를 만들고 그에 맞는 100여 곡을 지었어요. 왕산악이 거문고를 연주할 때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다고 해서 악기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현금(玄琴)이 됐다가 우리말로 검은고가 되면서 현재의 거문고란 이름이 됐다는 주장이 있어요.

고구려의 거문고는 7세기 말 신라에 전해졌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했어요. 특히 조선시대 선비들 사랑방에는 항상 거문고가 있었을 정도로 지배층에게 크게 사랑받는 악기가 되었답니다.


[거문고 명인 옥보고]

거문고를 고구려에서 신라로 전파한 데는 옥보고라는 인물의 공이 컸어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옥보고는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 육두품(왕족을 제외한 사람 중 가장 신분이 높았던 계층) 출신으로, 지리산에 들어가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우고 새로운 음악 30곡을 지었다고 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