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김부식 "中 역사만 알고 우리 역사 잘 몰라"… 5년 매달려 완성했죠

입력 : 2018.02.06 03:06

[삼국사기]

10년간 두 차례 반란 겪은 인종, 김부식 등에 正史 편찬하게 했죠
野史 중심의 '삼국유사'와 달라요… 정부, 조만간 두 인쇄본 국보 지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전해지는 '삼국사기(三國史記)'가 곧 국보(國寶)로 지정된다고 해요. 문화재청이 지난달 경주 옥산서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보물 제525호 '삼국사기'(1573년 인쇄)와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보물 제723호 '삼국사기'(1512년 인쇄 추정)를 모두 국보로 삼겠다고 밝혔기 때문이지요. 두 삼국사기는 각각 조선 선조·중종 때 인쇄한 것으로, 모두 9책(冊)으로 구성된 완본(完本)이랍니다.

'삼국사기'는 1145년 고려 제17대 왕인 인종 때 김부식이 여러 학자의 도움을 받아 편찬한 역사책이에요. 같은 시대에 쓰인 역사서로는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1281년 편찬)가 있지요. 오늘은 삼국사기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반란 속에 세력을 키운 김부식

12세기 초반, 고려에는 왕권에 도전하는 두 차례의 큰 반란이 일어났어요. 1126년 '이자겸의 난'과 1135년 '묘청의 난'이지요. 먼저 이자겸의 난은 열네 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인종을 대신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인종의 외할아버지 이자겸이 자신의 힘을 믿고 갖은 횡포를 부린 데서 출발했어요. 이를 보다 못한 인종과 여러 신하가 이자겸과 그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이자겸이 왕위를 빼앗으려고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붙잡혀 귀양을 간 사건이에요.

묘청의 난은 이자겸의 난 때 개경 궁궐이 불타는 등 피해를 입자 승려 묘청을 중심으로 서경(오늘날 평양) 출신 신하들이 서경으로 나라의 도읍지를 옮길 것을 주장하면서 시작됐어요. 개경 세력들이 이에 반대하자 서경 세력들이 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고려 사회는 또 한바탕 혼란에 휩싸였답니다.

10년 새 두 차례의 큰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기회 삼아 정치적 세력을 크게 키운 인물이 있었는데요. 당시 학문에 뛰어나기로 이름이 높던 문신(文臣) 김부식(1075~1151)이었어요. 김부식은 경주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과거에 급제한 뒤 한림원(임금의 명령을 문서로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에서 일하며 학자로서 명성을 쌓았지요. 1123년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은 저서 '고려도경'에서 김부식을 '학식이 넓고 깊어 글을 잘 짓고, 역사를 잘 알아 학자들의 믿음을 받고 있다'고 평했답니다.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 편찬

김부식은 이자겸이 권세를 누리고 있었을 때 주로 학문 활동에만 열중해서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이자겸이 반란에 실패해 귀양을 간 뒤에는 정2품 중서문하평장사라는 높은 관직에 오르는 등 순조로운 승진을 거듭했어요.

김부식은 개경 세력을 대표하는 관료로서 서경으로 도읍지를 옮기자는 묘청 등의 주장에 강력하게 반대했어요. 그래서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직접 왕명을 받아 군대를 거느리고 반란군을 진압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공신(功臣)'으로 책봉됐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종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당시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종1품 중서문하성 장관직)에 오르기도 했지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정서용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데 함께 공을 세운 윤언이라는 인물과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요. 그래서 김부식은 라이벌 윤언이를 내쫓기 위해 그가 묘청의 난을 일으킨 서경 출신 인물 정지상과 내통(남몰래 관계를 가짐)했다며 처벌할 것을 임금에게 요구했고, 이에 임금도 윤언이를 지방 한직(한가한 벼슬자리)으로 내쫓았지요. 그런데 인종이 1140년 다시 윤언이를 개경으로 불러들이려 하자 정치적 보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답니다.

인종은 그런 김부식을 위로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하도록 지시했고, 젊은 관료 8명을 보내 그 일을 돕게 했어요. 김부식은 5년 동안 열심히 편찬 작업에 매달려 1145년 '삼국사기'를 완성했고, 인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 앞에 올렸습니다.

◇"우리 역사에 대해선 막막… 한탄스럽다"

"지금의 학자와 관리들이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과 제자백가의 서적과 중국 진·한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아 자세히 설명하는 자가 많으나,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도리어 막막하여 그 처음과 끝도 알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완성한 뒤 임금에게 올린 글인 '진삼국사기표'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김부식은 이 글을 통해 중국의 다양한 역사 기록들이 우리나라 고대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전해지던 우리 역사책은 표현이 거칠고 내용이 부실해 왕이나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어요.

'삼국유사'가 일연 혼자 쓴 이른바 '야사(野史)' 서적이라면, '삼국사기'는 김부식 등 당대 최고 학자들이 쓴 정사(正史) 책이에요. 그렇다면 인종은 어떤 이유로 김부식을 시켜 '삼국사기'를 짓도록 한 걸까요? 두 차례의 큰 반란을 겪은 인종은 혼란스러운 나라 상황을 정리하고 고려가 어서 안정된 국가로 발전하길 바랐어요. 이에 따라 고려 이전에 있었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왕과 신하의 자세를 바로잡아 흔들리던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했지요. 김부식도 한 왕조의 흥망성쇠는 왕과 신하가 정치를 잘하고 못함에 있음을 과거 우리 역사를 통해 밝히고자 했던 거랍니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