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부서질 듯 허약하지만 걷고 또 걷는 인간… 삶의 위대함 상징해요
입력 : 2018.02.03 03:07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展]
스위스 화폐에 나온 조각가 자코메티
1·2차 세계대전으로 허무·불안 겪고 삶의 본질 묻는 조각 작품 만들었죠
'걸어가는 사람' 등 대표작 전시해요
한 나라 지폐에는 보통 그 나라 국민이 자랑스러워하는 위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자기 나라 역사에 커다란 공을 세운 위대한 정치가가 나오기도 하고, 훌륭한 책을 쓴 문학가나 가치 있는 생각을 펼친 사상가의 이미지가 실리기도 하지요.
유럽의 중립국 스위스는 정치가보다 예술가의 이미지를 자국 지폐에 주로 썼는데, 100스위스프랑(약 11만5000원)권 앞면에는 스위스가 자랑하는 20세기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Giacometti·1901~1966)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요. 뒷면에는 자코메티가 만든 작품 중 가장 크고 유명한 '걸어가는 사람'의 이미지가 보입니다〈사진1〉.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 가면 4월 15일까지 바로 이 지폐 속의 '걸어가는 사람'을 비롯해 자코메티의 여러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의 중립국 스위스는 정치가보다 예술가의 이미지를 자국 지폐에 주로 썼는데, 100스위스프랑(약 11만5000원)권 앞면에는 스위스가 자랑하는 20세기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Giacometti·1901~1966)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요. 뒷면에는 자코메티가 만든 작품 중 가장 크고 유명한 '걸어가는 사람'의 이미지가 보입니다〈사진1〉.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 가면 4월 15일까지 바로 이 지폐 속의 '걸어가는 사람'을 비롯해 자코메티의 여러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걸어가는 사람'은 실제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게 거의 뼈대만 남아있을 뿐이고, 표면도 너무나 거칠고 울퉁불퉁해서 한창 작업 중인 미완성 작품처럼 보입니다. 마치 수천 년 전에 죽었던 미라가 일어나 걷고 있는 듯, 부서질 듯 허약하고 건조한 인체가 보이지요. 왜 자코메티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외면한 채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작품을 만들었을까요?
'걸어가는 사람'에서 제시하는 인간은 원래부터 위대하고 강하게 태어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부서지기 쉬운 나약한 존재일 뿐이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두 발로 일어서는 게 인간입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기 시작해서, 그 걸음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멈추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고 있지요. 이런 인간의 모습을 자코메티는 위대하다고 본 것입니다.
작품2는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인데, 무언가 참혹한 일을 경험한 사람처럼 얼굴 표정이 무겁고 심각해 보입니다. 조각을 이루는 핵심 요소들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감성을 표현할 때는 표면 재료가 주는 느낌(질감)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요. 이 작품은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진지한 구도자(求道者)의 모습 같은데, 재료를 던져 붙인 듯 온몸을 덮은 거친 표현으로 인해 구도의 과정이 험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어요.
1901년 태어난 자코메티는 열세 살 되던 해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걸 지켜보았고, 서른여덟 살부터 또다시 2차 세계대전을 생생하게 겪었습니다. 두 번의 큰 전쟁으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바로 곁에서 수많은 이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고, 인간이 사는 세상이 조만간 끝날 수 있다는 불안과 허무에 빠졌지요. 그리고 여태까지 자신들이 추구해왔던 신념들에 의문을 품으면서, 지식과 논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철학적 흐름을 '실존주의(實存主義)'라고 하는데, 자코메티의 작품은 당시의 실존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어요.
자코메티는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실존주의 문학가인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극 무대 장치를 제작하기도 했는데요.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누군가를 지치도록 기다립니다. 진짜로 올지 안 올지, 내일 올지 한참 후에 올지 모르는 대상이지만, 그것을 만나려면 그저 하루하루 성실하게 지내며 기다릴 수밖에 없지요.
사진2는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자코메티의 사진이에요. 갑작스레 내리는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외투를 머리 쪽으로 끌어올린 채 걷고 있는 예술가의 모습이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자코메티가 남긴 말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