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검은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노예 해방… 최초 흑인 공화국 만들었죠

입력 : 2018.01.25 03:09

[아이티 혁명]

17세기 프랑스가 통치한 생도맹그… 아프리카 흑인 노예 대거 들어왔죠
독립 운동가 투생, 노예 해방 주도해 1804년 아이티 건국 이끌었어요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민법 개혁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왜 아이티와 아프리카 같은 '똥통(shithole)'에서 온 사람들을 모두 받아줘야 하느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에 휩싸였어요. 이에 국제사회는 트럼프 대통령 발언을 인종차별이라고 규탄했답니다.

트럼프 대통령 발언으로 화제가 된 '아이티 공화국'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금은 가난한 나라가 됐지만, 한때 유럽과 신대륙을 오가는 화물선이 가장 많이 드나들며 번성했던 지역이기도 했어요. 남아메리카에서 프랑스가 유일하게 식민지로 통치한 나라이면서 세계 최초로 흑인들이 공화국을 세운 '아이티 혁명'이 일어난 곳이기도 해요. 오늘은 아이티의 역사를 알아볼게요.

◇프랑스 지배를 받다

1492년 10월 에스파냐(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탐험가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의 한 섬에 도착했어요. 콜럼버스는 그곳을 '작은 스페인'이라는 뜻을 지닌 '히스파니올라(Hispaniola)'라고 이름 붙였지요. 에스파냐는 이 섬에 식민 도시 '산토도밍고'를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확대해 나갔어요.

(왼쪽)프랑스군에 맞서 노예 해방 투쟁을 벌이는 투생 루베르튀르와 흑인 노예들 모습. (오른쪽)독립운동가 투생 루베르튀르.
(왼쪽)프랑스군에 맞서 노예 해방 투쟁을 벌이는 투생 루베르튀르와 흑인 노예들 모습. (오른쪽)독립운동가 투생 루베르튀르. /게티이미지코리아·위키피디아
17세기가 되자 프랑스도 히스파니올라 섬 서부 지역에 정착했는데 그곳을 '생도맹그'(산토도밍고의 프랑스어 표현)라 불렀어요.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간 프랑스는 1697년 에스파냐로부터 히스파니올라 섬 서부 지역을 넘겨 받았지요.

생도맹그에서 프랑스는 커피·사탕수수 농장을 대규모로 운영하며 부를 축적했어요. 18세기 후반 생도맹그에서 나는 설탕이 자메이카·쿠바·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설탕보다 많고, 커피 생산량은 전 세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막대했지요. 당시 생도맹그에는 유럽의 어떤 항구보다 많은 선박이 드나들었을 만큼 번영을 누렸답니다.

초기 식민지 시절 히스파니올라에서 소수의 백인은 다수 원주민 노동력을 이용해 농장을 운영했어요. 그런데 원주민들은 유럽의 정복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천연두 등 각종 감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어요. 원주민이 대거 사망하면서 1492년 50만명 정도이던 원주민 인구가 20여 년 후 고작 2만90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요. 농장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해지자 백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대규모로 데려와 부리기 시작했어요.

◇독립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

아이티는 어떤 곳?
시간이 지나면서 히스파니올라에는 유럽인과 흑인 노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 '물라토'가 증가했어요. 그들은 백인 다음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보유해 중간 계층을 형성했지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일부 물라토 세력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혁명 정신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의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장 봉기를 시도하기도 했어요.

이 무렵 등장한 지도자가 바로 흑인 노예 출신의 독립운동가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1743~1803)예요. '검은 스파르타쿠스(고대 로마의 노예 검투사)' '흑인 자코뱅(급진파)'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지요. 그의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붙잡혀온 흑인 노예였지만 특유의 총명함을 인정받아 농장의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맡았어요. 덕분에 다른 흑인 노예들에 비해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자란 투생은 어려서부터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주인의 집사 노릇을 하며 신뢰를 얻었지요. 그리고 흑인 노예들을 조직적으로 이끌며 1791년부터 흑인 노예 해방 전쟁을 진두 지휘했어요.

프랑스가 혁명으로 혼란에 휩싸이자 영국과 에스파냐가 생도맹그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었어요. 투생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활용해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어요. 프랑스가 흑인 노예 해방에 미온적일 때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싸우고, 프랑스가 노예 제도 철폐를 선언하자 프랑스편으로 돌아서 에스파냐와 싸우는 식이었지요. 또 협상을 벌인 끝에 영국군을 철수시켜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되찾았어요.

이 과정에서 투생의 영향력은 막강해졌어요. 나중엔 혁명 정부 최고 지도자가 됐고 에스파냐령 산토도밍고를 공격해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를 통일했지요. 하지만 투생이 식민지 자치 헌법을 만들자 프랑스의 새 통치자 나폴레옹이 2만여 명의 군사를 보내 이를 탄압했고, 투생도 결국 체포되고 말았어요. 프랑스 동부 지역의 한 성에 감금된 투생은 건강 악화로 1803년 세상을 떠났지요.

생도맹그 흑인들은 프랑스군과 전투를 계속 벌였어요. 총 8만 명의 병력을 보냈던 나폴레옹은 전쟁이 길어지자 1803년 말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어요. 1804년 1월 1일 생도맹그 사람들은 나라 이름을 '아이티'(높은 산의 나라라는 뜻)로 정하고 독립을 선언했답니다. 투생이 죽은 지 7개월 만의 일이었지요. 아메리카 대륙에선 미국(1783년)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한 나라였고, 남아메리카에선 최초로 독립을 일궈낸 나라가 됐어요. 게다가 세계 최초로 흑인들이 세운 공화국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어요.


[아이티의 현재]

독립 후 아이티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물라토와 흑인들이 나뉘어 14년간 내전을 벌이면서 국토가 황폐화됐고, 1844년엔 산토도밍고 지역이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독립하는 바람에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잃었어요. 다른 남아메리카 지역에서도 커피·설탕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과거와 같은 경제적 부를 누릴 수 없었어요.

20세기에는 잠시 미국 지배를 받기도 했고, 수십 년간 독재를 경험한 뒤 1990년 처음으로 민주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했답니다. 하지만 아직까진 쿠데타 등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고 있어요. 2010년엔 대지진 피해를 크게 입어 유엔 등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요.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