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60만 중 수만 명만 살아남아… 나폴레옹, 러시아 혹한에 무너졌죠
입력 : 2018.01.11 03:08
[맹추위와 러시아 원정]
대혁명 이후 권력 잡은 나폴레옹 '대륙 봉쇄령' 어긴 러에 전쟁 선포
어렵사리 모스크바에 도착했지만 맹추위 등 대비 못해 참패했어요
지구촌 곳곳에 기상 이변이 속출하고 있어요.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지역에는 폭설과 강풍이 불어닥쳐 도시가 마비되고 비행기가 무더기 결항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어요. 중국의 중·동부 지역 등에는 기록적 폭설이 쏟아졌고, 프랑스에는 태풍이 불어와 강이 범람하기도 했어요. 이처럼 기상 상황은 인간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전쟁할 때에도 날씨로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는 일이 많았는데요. 오늘은 유럽을 제패하고 러시아를 무릎 꿇리려던 나폴레옹의 꿈이 자연의 위력 앞에 무너졌던 역사 속 장면으로 들어가 봐요.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다
17세기 프랑스 왕궁은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어요.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스스로를 '태양왕'이라 부르며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프랑스의 힘을 과시했죠. 하지만 루이 14세가 죽자 곳곳에서 비극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1774년 왕위에 오른 루이 16세는 사치를 일삼았고, 영국을 견제하겠다며 무리하게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을 지원하다 나라 재정은 파탄 상태에 이르렀지요.
전쟁할 때에도 날씨로 승자와 패자가 뒤바뀌는 일이 많았는데요. 오늘은 유럽을 제패하고 러시아를 무릎 꿇리려던 나폴레옹의 꿈이 자연의 위력 앞에 무너졌던 역사 속 장면으로 들어가 봐요.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다
17세기 프랑스 왕궁은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어요.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스스로를 '태양왕'이라 부르며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프랑스의 힘을 과시했죠. 하지만 루이 14세가 죽자 곳곳에서 비극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1774년 왕위에 오른 루이 16세는 사치를 일삼았고, 영국을 견제하겠다며 무리하게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을 지원하다 나라 재정은 파탄 상태에 이르렀지요.
- ▲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의 모습을 그린 19세기 그림. /위키피디아
파리 시민들은 자유·평등·박애를 외치며 과거 체제를 바꿔나갔어요. 교회와 귀족의 재산을 몰수했고, 영주의 성을 습격해 토지 문서를 불태웠죠. 혁명의 불길은 루이 16세를 처형하는 데까지 이르렀어요.
이웃 나라 왕들은 루이 16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서로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했지요. 자신들도 언젠가 루이 16세처럼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프랑스는 외국과 전쟁까지 치르게 되자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졌어요. 그 틈을 노려 일부 귀족은 혁명을 뒤집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요.
국민 지지를 등에 업은 나폴레옹은 1804년 국민투표로 프랑스 황제가 됐어요. 혁명을 통해 왕정을 무너뜨린 국민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제정(황제가 통치하는 체제)을 받아들인 거예요.
◇러시아 원정 대참패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러시아 동맹군을 격파하고 1806년 베를린에 입성해 전 유럽에 베를린 칙령을 선포했어요. 이 칙령에는 "유럽 어느 나라도 영국과 물건을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는 '대륙 봉쇄령'이 포함됐는데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켜 쇠약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죠.
하지만 대륙 봉쇄령은 영국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어요.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은 굳이 유럽과 교류하지 않아도 별로 손해 볼 것이 없었죠. 오히려 영국과 교류하지 못하게 된 유럽 다른 나라들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그중 러시아가 영국과 다시 무역하겠다고 선언했어요.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며 러시아 원정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전투병 45만 명과 지원병 15만 명으로 구성된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향했어요. 러시아도 군대를 모집했지만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드넓은 국토와 혹독한 추위를 무기로 전쟁을 길게 끌기로 결심했어요.
프랑스군은 출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수시로 비가 내려 마차가 진흙에 빠지면서 사용할 수 없는 보급품이 늘어났죠. 습하고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전염병이 돌았고, 일교차가 너무 커 나폴레옹도 열사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어요. 아직 러시아군과 싸움도 못 했는데 전투 병력 45만 명 중 23만 명밖에 남지 않았죠.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서쪽 접경에 도착했을 때는 말들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버리고 말았어요.
같은 해 9월, 나폴레옹이 어렵사리 모스크바에 도착했어요. 하지만 도시는 텅 비어 있었고, 모스크바 교외가 불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러시아가 프랑스 군대가 이용하지 못하도록 주변 시설과 자원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린 것이었어요.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5주 동안 머물며 러시아 황제의 항복을 요구했지요.
당시 프랑스군은 식량이 부족해 온종일 시내의 고양이를 잡아먹기 위해 돌아다닐 만큼 굶주렸어요. 모스크바의 날씨는 영하 20도에 육박했는데, 속전속결로 러시아를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프랑스군은 추위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아 피해가 더 컸어요.
러시아가 항복하지 않자, 결국 나폴레옹은 철수 명령을 내렸어요. 프랑스군이 퇴각하자 러시아 기병대의 추격이 시작됐어요. 프랑스군은 필사적으로 후퇴했지만 기병대의 거침없는 공격과 오랜 굶주림, 혹한 속에서 수많은 군사가 죽어나갔어요. 12월 6일부터 4일간은 영하 38도까지 떨어졌고 군사 4만 명이 죽었지요. 60만 병력 중 55만여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세계 전쟁 역사상 보기 드문 대참패였죠. 이후 유럽 전역의 프랑스 점령 지역에서 나폴레옹에게 저항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됐고, 프랑스 제국의 힘도 쇠퇴하기 시작했어요.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혹한에 철저히 대비했다면 세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나폴레옹의 최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실패 이듬해인 1813년 유럽 연합군에 패배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어요. 지중해의 엘바섬에 유배당했던 그는 탈출에 성공해 프랑스로 돌아와 다시 황제 자리에 올랐지요. 하지만 벨기에 남동부 지역에서 벌어진 워털루전투(1815년)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등 연합군에 참패를 당하면서 세인트헬레나섬에 또다시 유배당했고 1821년 그곳에서 숨을 거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