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운동 멀리하고 고기 즐긴 세종대왕, 당뇨로 고생했어요
[역사 속 뚱보 인물]
육류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던 세종, 독서·연주 등 앉아서 하는 취미 즐겨
"병 나으면 또 병 생겨" 한탄했어요… 영조도 아들 사도세자 비만 걱정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비만율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초고속 후뚱(후천적 뚱보) 사회'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어요. 이처럼 우리나라에 뚱보가 빨리 늘어나게 된 것은 식습관이 서구화하면서 고지방·고열량 음식 섭취량은 늘어난 반면 운동량은 점점 줄어들어 후천적으로 살이 찐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과거에도 유명한 '후뚱' 인물들이 있었답니다.
◇뚱뚱보 임금 세종대왕
1418년 6월,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은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어요. 양녕대군이 여러 잘못을 저지르고 반항하자, 자신이 어렵게 이룩한 왕권을 이어받을 인물이 못 된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러면서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에 성실하며, 정치하는 방법도 잘 안다"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선택했어요. 어진 사람을 세자로 고르자던 신하도 대부분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은 태종의 선택을 반겼지요.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418년 8월 태종은 세자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물러났는데, 그 충녕대군이 바로 세종대왕이랍니다.
그런데 왕위에서 물러난 태종이 세종에 대해 안타깝게 여긴 점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은 세종이 뚱뚱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태종은 세종과 함께 자주 궁궐을 벗어나 사냥을 다니며 살이 쪄 뚱뚱해진 세종의 몸을 적당하게 조절해주려 했어요.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肥重·몸에 살이 쪄서 무거움)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태종이 세종과 함께 사냥을 가면서 한 말이에요. "주상 몸이 무거우니 내일은 주상과 더불어 노상왕(정종)을 모시고 동쪽 교외 광진에 가고자 한다. 또 앞으로 양근·광주에서 사냥할 터이니…"라는 이야기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답니다.
- ▲ 그림=정서용
세종대왕이 이처럼 뚱보가 된 것은 사냥처럼 운동이 되는 신체 활동보다는 독서나 악기 연주처럼 주로 앉아서 하는 취미를 즐겼기 때문이에요. 어려서부터 독서에 너무 열중해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밤새 글을 읽어 태종은 아들이 병이 날까 염려했고 밤에 글 읽기를 금지하기도 했어요. 또 세종대왕은 어려서부터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육류를 좋아했어요. 그런 환경에서 세종대왕은 뚱보가 되었고 비만에 당뇨병, 피부병, 눈병까지 겹치며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오래 고생했어요. 너무 많은 병을 달고 살아 42세(세종 21년) 때에는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겨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세종실록)고 한탄했을 정도였다고 해요.
◇뚱뚱보 사도세자, 뒤주에 갇히다
세종대왕과 달리 사냥을 무척 좋아했지만 뚱보가 된 역사 속 인물도 있었어요. 바로 조선 제21대 왕 영조가 마흔 넘어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인 사도세자 이선이랍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큰아들이었던 효장세자가 불과 아홉 살에 병을 얻어 죽은 뒤 7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어요. 영조는 그런 사도세자를 태어난 이듬해인 1736년 서둘러 왕세자로 책봉하였지요.
아기 때 사도세자의 체격은 유달리 커서 100일이 되었을 때 세자를 본 신하들은 '체격이 좋다'고 덕담했다고 해요. 그러나 세자가 자라면서 뚱뚱해지자 영조는 어린 세자의 비대한 몸집을 걱정했고, 쉽게 병이 생기는 건 아닌지 우려하기 시작했어요.
영조 20년인 1744년 '승정원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기록돼 있어요. "세자는 식사량이 너무 많고 식탐을 억제하지 못해 뚱뚱함이 심해지고 배가 나와 열 살 아이 같지 않다." "음식을 좋아해서 정말 답답하다. 식탐을 조절하지 않으니 날로 살찔 뿐이다." 내의원(왕실 병원)에는 세자의 비만을 치료할 약을 지으라는 지시를 내렸지요.
사도세자는 체격이 크고 뚱뚱했지만 무인(군인) 기질이 강하고 무예가 뛰어났어요. 15세 무렵에는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기 힘든 청룡도라는 크고 무거운 칼이나 커다란 쇠몽둥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학문에만 열중하기를 바란 영조의 기대에 어긋나 아버지에게 심한 꾸중을 계속 받게 됐고, 심리적 부담과 불안감에 휩싸여 정신병과 우울증을 앓게 되었답니다. 나중엔 증상이 심해져 여러 주변 사람을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영조는 이러한 사도세자와 수년 간 불화를 겪었어요. 결국 영조는 1762년 무더운 여름에 사도세자를 뒤주(곡식 등을 저장하는 작은 궤)에 가두었는데 사도세자는 피부병 있는 비대한 몸으로 좁디좁은 뒤주 안에서 힘겨워하다가 갇힌 지 8일째 되는 날에 27세 나이로 숨지고 말았어요.
☞'뚱보' 방정환 선생
어린이의 영원한 친구인 방정환 선생의 별명은 '뚱보 아저씨'였어요. 1923년 최초의 '어린이날'을 만들며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던 인물이지요. 동화 집필, 구연동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33세 젊은 나이에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비만이 그의 건강을 해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짐작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