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100년 전 '민족자결주의', 수많은 약소국에 희망 주었죠

입력 : 2018.01.04 03:08

[윌슨의 14개 평화 원칙]

美, 1차 세계대전 말인 1918년 발표
'각 민족 운명은 스스로 결정' 선언… 우리나라 3·1운동에도 영향 줬어요
사회주의 확산 견제할 목적도 있어

올해는 20세기 초 전 인류에게 큰 아픔을 남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하면서 막을 내렸지요. 이 전쟁은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 전쟁으로, 1000만명 이상이 사망하는 아픈 상처를 남겼지요.

세계대전 종전을 수개월 앞둔 1918년 1월 8일, 미국의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우리에게 '민족자결주의'로도 유명한 '14개 평화 원칙'을 발표했답니다. 윌슨의 평화 원칙은 강대국들에 식민 지배를 당하던 수많은 약소국 민족들에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주었지요. 우리나라의 3·1운동도 이에 힘입은 민족운동 중 하나였어요.

오늘은 1차 세계대전 종전과 윌슨의 평화 원칙에 대해 알아볼게요.

◇100년 전 윌슨, 14개 평화 원칙 발표

1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를 상대로 식민지 경쟁을 벌이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 간 싸움에서 비롯된 커다란 전쟁이었어요.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지요. 19세기 말 프랑스를 견제하던 독일이 오스트리아·이탈리아와 손잡고(삼국 동맹), 독일을 견제하던 프랑스가 영국·러시아와 동맹을 맺으면서(삼국 협상) 유럽 대륙엔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전쟁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답니다.

왼쪽부터 데이비드 조지 영국 총리, 비토리오 오를란도 이탈리아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1차 세계대전 연합국 정상들이 파리 강화 회의에 모인 모습. 왼쪽부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비토리오 오를란도 이탈리아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위키피디아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그러자 세르비아를 지원하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던 독일이 대립했고, 이어서 러시아와 동맹이던 영국·프랑스가 참전하면서 총 40여 국가가 전쟁에 뛰어드는 이른바 '세계대전'으로 확대됐지요.

전쟁이 3년 차에 접어들 무렵, 미국이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가합니다. 미국은 그동안 '먼로주의'에 따라 유럽 제국주의 국가 간 싸움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요. 오히려 한창 전쟁 중이던 영국·프랑스 등 유럽 주요 산업국가들을 대신해 각종 물자를 생산하며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일구고 있었어요. 그러나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2월 혁명)이 일어나고, 독일이 잠수함 작전을 펼치면서 영국·프랑스 등 연합국이 불리해지자 결국 1917년 4월 참전을 결정했지요.

러시아의 레닌이 10월 혁명까지 성공시키고 공산국가를 수립하자,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어요. 러시아에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빠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고, 실제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강화조약을 맺으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여기에 레닌이 '우리는 약소민족을 지원하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세계 곳곳에 사회주의가 확대되는 분위기가 나타났어요. 이를 견제하고 미국의 국익을 도모하고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슨은 1918년 1월 '14개 평화 원칙'을 발표합니다.

◇2차 세계대전 씨앗 품은 파리강화조약

윌슨의 '14개 평화 원칙'은 제1조부터 철저하게 '비밀 외교'를 비판하고 공개적인 국제 협약을 체결하자고 강조합니다. 러시아와 독일이 비밀리에 접촉해 강화조약을 맺으려고 하는 것을 비판하는 조항이었지요. 이뿐만 아니라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민족자결주의의 뜻을 담아냄으로써 약소국 민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자 했습니다.

'14개 평화 원칙'을 보도한 신문(왼쪽).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 모습(오른쪽).
'14개 평화 원칙'을 보도한 신문(왼쪽).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 모습(오른쪽).
윌슨의 이 같은 주장은 러시아·독일 간 강화조약 체결(1918년 3월)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이상적인 평화를 위한 원칙으로 연합국 사이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답니다. 또 연합국의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로 인정되었지요. 경제 장벽의 제거와 평등한 무역, 불필요한 군비 축소,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조정, 국제 평화를 위한 연합체(훗날 국제연맹) 구성 등 모든 민족과 국가에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미 있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윌슨의 이상주의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 간 '땅따먹기' 자리였던 '파리 강화 회의'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대표들은 1919년 1월 18일부터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 강화 회의를 열었는데요. 처음에는 윌슨의 평화 원칙에 집중하면서 세계 평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조약에 반영된 것은 국제연맹의 창설과 민족자결주의뿐이었고, 나머지는 패전국인 독일에 전쟁의 책임을 묻고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리는 데 혈안이 돼 있는 조항들뿐이었지요.

독일 국민들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맺어진 '베르사유조약'이 '독일 국민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생각했고, 연합국에 대한 원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했던 거랍니다.

그럼에도 윌슨 대통령은 평화 원칙의 일부가 반영된 베르사유조약만이 세계대전 같은 참혹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어요. 끊임없이 대규모 연설을 다니며 미국 내 여론을 설득하고 다녔지요. 하지만 1918년 상·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서 민주당 소속이던 윌슨의 목소리는 힘을 잃게 되었고, 결국 베르사유조약은 미국 상원에서 끝내 비준되지 못했답니다.

미국이 불참한 상태에서 출범한 국제연맹은 실질적인 군사·경제적 권한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출발했어요. 역사학자들은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오직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됐을 뿐이고, 사실 그가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를 완성하려고 한 것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답니다.

윌슨은 "서로 편을 가르고 맞설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편이 되어 공동의 평화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을 맞는 2018년 오늘날 지구촌은 한 세기 전보다 얼마만큼 더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나요?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는 어떤 평화 원칙이 필요할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먼로주의 (Monroe Doctrine)

1823년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밝힌 외교 방침. 한마디로 미국은 유럽 일에 간섭하지 않겠으니 유럽도 아메리카 대륙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이후 약 100년간 미국의 주요 외교 방침이 되었지요.


이정하 천안 계광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