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시대 앞서간 화가 고흐·모딜리아니… 평생 가난 시달렸죠

입력 : 2017.12.16 03:05

[예술가와 가난]

독창적인 화풍 선보였던 미술가들, 사후 높은 평가 받고 유명해졌어요

고흐, 내면 감정 따라 색·형태 표현
모딜리아니는 비대칭 인물화 그려

'2015 예술인 실태조사'에 의하면 미술가의 예술활동 연평균 수입이 614만원(월 약 51만원)으로 예술인 전체 평균 1255만원의 48.9%에 불과해 매우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어요. 과거에도 미술가들은 가난한 경우가 많았지요. 미술가들은 왜 이토록 가난할까요?

살아있을 때는 무척 가난했으나 죽은 후에는 그림이 매우 비싸게 팔리는 세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해요. 작품1은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an Gogh·1853~1890)가 벨기에 시인이자 화가인 외젠 보슈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반 고흐는 시인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친구인 외젠 보슈의 모습을 빌어 표현했지만, 미술계와 대중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어요. 당연히 그림도 팔리지 않았지요. 현재 반 고흐의 작품은 세계 미술시장에서 상상을 초월한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지만, 3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점이 400프랑에 팔렸을 뿐입니다. 남동생 테오가 매달 생활비와 작업비를 보내주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웠어요. 반 고흐의 그림은 왜 생전에는 팔리지 않았을까요?

작품1~3
시대를 앞선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그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는 전통 기법을 본받는 그림을 그렸어요. 그러나 반 고흐는 예술가의 내면에 있는 감정을 화폭에 표현하는 데 목표를 두었어요.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색과 형태를 왜곡했지요.

예를 들어 이 그림에서도 시인의 머리둘레는 신성(神聖·고결하고 거룩함)을 상징하는 황금빛 후광으로 장식했고, 양복 색도 황금색으로 칠했어요, 배경은 별이 반짝이는 우주 공간을 상징하는 진한 파란색을 칠했고요. 시인이 현실 세계를 초월한 신성한 존재이며 창조적 영감을 얻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이런 반 고흐 화풍은 그 시절에는 매우 낯설어 대중의 거부감을 불러일으켰고 미술시장에서도 관심을 끌지 못했어요.

혁신적인 반 고흐 그림에 대중의 눈이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테오는 세월이 지나면 반 고흐 그림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거라고 믿었지요. 그래서 아내 요한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답니다. '형은 시대를 가장 앞서가는 화가들 중 한 사람이라서 형을 잘 아는 나조차 이해하기 어렵다오… 하지만 난 미래에는 사람들이 형을 이해할 거라고 확신하오. 문제는 그것이 언제냐 하는 것이라오'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Modigliani·1884~1920)도 반 고흐처럼 새롭고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였다는 이유로 생전에 그림이 거의 팔리지 않았어요. 모딜리아니가 아내 잔 에뷔테른을 그린 작품2는 한눈에도 이상하게 보여요.

두 눈이 비대칭인 데다 눈동자도 없고 긴 코는 휘어졌어요. 얼굴형, 목, 손도 길게 늘인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었어요. 얼굴 비례가 전혀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인물화인거죠. 인체를 변형시킨 모딜리아니 표 인물화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했어요. 당시 대중이 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맞지 않았거든요.

모딜리아니는 1917년 파리의 한 화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열었지만 출품된 누드화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비난을 받고 개막식 날 그림을 떼어내는 수치스러운 일을 겪었어요. 전시회도 곧 막을 내렸지요.

지독한 가난으로 고생하던 모딜리아니는 결핵에 걸려 36세로 파리의 한 자선병원에서 숨을 거뒀어요. 가난한 화가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모딜리아니는 현재 그림 값이 가장 비싼 화가의 명단에 올랐고 그의 인물화는 '고독한 현대인의 원형(原形·본래 모습)을 그렸다'는 찬사를 받고 있어요. 개인전에서 철수당했던 '누워있는 누드' 그림은 2015년 11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040만달러(당시 환율 약 1972억원)에 낙찰되는 영광을 누렸어요. 20세기 초와 21세기는 여인의 누드를 바라보는 잣대가 달라진 거죠.

한국 화가 이중섭(1916~1956)도 생전에는 가난했지만 죽은 후에 유명해지고 작품 값도 크게 올랐어요. 작품 3에서 팬티만 입은 채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이중섭이고, 화폭에 그려진 네 사람은 화가 자신과 그의 가족입니다. 이중섭은 6·25 전쟁이 일자 가족과 함께 피란 생활을 하던 중 가난에 지쳐 1952년 사랑하는 가족을 아내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의 고향인 일본으로 떠나보냈어요. 이후 전쟁과 가난,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고통의 세월을 보내다가 1956년 40세에 홀로 눈을 감았어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재능이 뛰어난 이중섭이 왜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을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웠을까요? 그때는 미술시장도 없었고, 미술품을 재산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어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감상용으로, 또는 친한 사람들에게 선물하려는 목적으로 주로 그림을 샀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림의 경제적 가치를 깨닫게 된 계기는 1970년 4월 전문상업화랑으로는 한국 최초인 현대화랑이 문을 열고 미술품을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한 이후부터랍니다. 이중섭의 그림을 거래하는 미술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지독한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난 거지요.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