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156일 淸 여행 기록… 정조, '불순하다'며 출판 금지했죠

입력 : 2017.12.12 03:08

[열하일기(熱河日記)]

연암 박지원의 中 기행문 '열하일기'
청나라 新문물·제도 등 자세히 묘사… 속어와 농담 등 섞어 소설처럼 써
조선 후기 '문체반정' 발단됐어요

얼마 전 조선 후기 문신(文臣·문과 출신 관리)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중국 기행문인 '열하일기(熱河日記)' 원본이 우리말로 출간됐다는 뉴스가 전해졌어요. 박지원이 1783년 완성한 열하일기는 당시 큰 인기를 끌며 전국으로 퍼졌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베껴 쓰면서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고 해요. 그런데 2010년 한 대학의 고문서(古文書) 더미에서 열하일기 초고본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7년여 만에 우리말 완역본이 나온 것이지요.

많은 지식인이 열하일기를 '조선 최고 여행기' '조선 최고 명문장(名文章)'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요. 하지만 당시엔 정조 임금의 지시로 출판이 금지되면서 오랫동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지요.

◇소설만큼 흥미진진한 기행문

1780년(정조 4년) 박지원은 청나라 6대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따라 중국에 갔어요. 평안북도 의주를 출발해 베이징을 거쳐 건륭제의 여름 별궁이 있던 열하(熱河) 지역, 즉 오늘날의 청더(承德)를 여행하게 됐지요. 당시 열하는 베이징에 버금가는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는데, 박지원은 열하를 중심으로 청나라에 머무는 156일 동안 놀랍게 발전한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 과학기술을 목격할 수 있었어요. 또 청나라 학자뿐 아니라 몽골·티베트인들과도 교류하면서 자신이 몰랐던 세계와 문화를 경험하게 됐어요.

[뉴스 속의 한국사] 156일 淸 여행 기록… 정조, '불순하다'며 출판 금지했죠
/그림=정서용
"청나라의 문물이 이토록 번성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 조선 선비들은 명나라만 찾고 청나라를 배격하는가?" 박지원은 이런 한탄과 함께,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청나라의 좋은 점을 조선에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한양에 돌아와 기행문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이것이 열하일기랍니다.

열하일기의 인기 비결은 무엇보다 글이 재미있다는 점이었어요. 박지원은 여행에서 목격한 기묘한 풍경과 다양한 사람들, 낯선 문물을 자세히 묘사했어요. 마치 독자가 청나라를 직접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지요. 또 토속적 속어(俗語·점잖지 못한 상스러운 말)뿐 아니라 하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기록했어요. 여행 중 느꼈던 자기감정과 처지도 솔직하게 표현했고,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장면 중심으로 구성해 흥미를 불러일으켰어요.

어떤 사건을 묘사할 땐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쓰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예를 들어 누군가의 이상한 꿈자리를 묘사하고 이후 벌어진 소동을 자세하게 쓴 뒤 맨 마지막에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는 식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아냈지요. 이런 문체는 당대 유학자들이 쓰던 글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어요. 박지원의 대표적 한문 소설인 '호질'과 '허생전'도 바로 열하일기에 담긴 작품이랍니다.

◇"불순한 글… 속죄하라"

이렇게 재미있는 글이었지만, 열하일기 문체(文體·문장의 특색)는 당대 기득권층의 비난 대상이 됐어요. 박지원이 실학자인 이덕무, 박제가 등과 함께 열하일기를 낭독할 때, 박남수란 인물은 열하일기를 촛불에 불태워버리려고 했지요. "선생의 글은 훌륭하기는 하지만 유학(유교) 본래의 도리에 맞는 고문체(古文體)가 아니고 이야기책 투입니다. 열하일기 때문에 우리나라 문장이 모두 고문을 버리고 이야기 투 글이 될까 크게 걱정됩니다!"

정조 임금은 열하일기를 경계했어요. "요즘 바탕을 알 수 없는 불순한 글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박 아무개(박지원) 죄가 아닐 수 없다. 열하일기는 나도 이미 익히 읽어보았는데 그 책이 세상에 유행한 뒤로 문체가 이를 따라 함이 많으니…."

정조는 박지원에게 "순정(醇正·순수하고 올바름)한 글로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라"고 지시했고, 이야기 투로 글을 쓰는 신하들에게 '불순한 문체를 쓴다'고 반성문을 쓰게 했지요. 정조는 오직 '논어' '맹자' 같은 고전에서 쓰는 딱딱하고 전통적인 글만을 쓰도록 했어요. 이를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고 해요.

정조는 왜 문체반정을 실시한 걸까요?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더 견고하게 해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 후기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는 목적에서 그랬다는 주장이 많아요. 백성이 자기감정이나 상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이야기에 빠져들면 도덕과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분제가 흔들리고 백성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지요.

이후 정조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열하일기를 잡서(雜書)로 규정해 출판을 금지했어요. 이 때문에 열하일기는 1901년 활자본으로 처음 간행될 때까지 필사본(손으로 쓴 책)으로만 퍼졌답니다. '문체반정'은 모처럼 싹트려 했던 조선 후기 문학 발전을 방해하고 백성의 꿈틀대던 욕구를 억누른 조치였다는 평가가 많아요.


[호질과 허생전]

열하일기에 수록된 '호질'과 '허생전'은 조선 후기 양반의 위선을 비판한 한문 소설이에요. 호질은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사실은 타락한 양반인 북곽 선생을 호랑이가 꾸짖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허생전은 책만 읽으며 일하지 않던 양반인 허생이 어느 순간 장사꾼으로 변신한 뒤 겪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