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걷고 걷는 사람들… 얼굴 대신 발걸음으로 표정 읽어요
[수원 시립 아이파크 미술관 '줄리언 오피'展]
영국의 현대 미술가 줄리언 오피, 다양한 발걸음으로 분위기 표현
개성있는 차림새와 배경색으로 도시 거리를 걷는 매력 보여주죠
바깥에 나가면 거리에 많은 사람이 있어요.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바쁜 듯이 걷고 있지요.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책을 쓴 미국 작가 리베카 솔닛은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은 위대하다고 말했어요. 솔닛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만일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니는 걸 누군가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이것은 그저 산책 시간을 없앤 정도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빼앗은 것이다."
오늘은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그려 유명해진 영국의 현대 미술가 줄리언 오피(Opie ·59)의 작품들을 살펴볼까 합니다.
- ▲ 줄리언 오피 ‘군중’ 서울스퀘어 미디어 캔버스, LED 설치, 2009. /수원 시립 아이파크 미술관 ‘줄리언 오피’展
혹시 몇 년 전 서울역 맞은편에서 고층 건물 벽면 전체를 이용한 대형 미디어 캔버스〈사진〉를 본 적 있나요? 그것으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오피의 작품을 반갑게도 또 만날 수 있어요. 경기도 수원 시립 아이파크 미술관에서 내년 1월 21일까지 여는 '줄리언 오피 개인전'입니다.
영국 명문 예술대인 골드스미스대를 졸업한 오피는 현존하는 21세기 팝 아티스트 가운데 아주 유명한 작가 중 하나로 꼽힙니다. 단순한 선과 형태, 강렬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지요.
오피가 선보이는 팝 아트(pop art)는 광고나 방송 등 대중문화 이미지를 순수예술 속으로 끌어들인 20세기 미술계의 한 경향을 말해요. 앤디 워홀, 올든버그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지요.
- ▲ 작품1 - 줄리언 오피 ‘빗속의 사당동 걷기(Walking in Sadang dong in the Rain)’ 2014.
오피는 서울 사당동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 인상을 화면에 담았어요〈작품1〉. 그가 본 서울 거리는 아주 활기가 넘쳐 보입니다. 어느 기분 좋게 비 오는 날 도시의 풍경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사람들의 구두와 운동화가 가장 먼저 눈에 띄고, 위로는 우산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어떤 사람은 휴대전화로 대화하고 있어요. 이들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각자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걷고 있지요. 서로 마주친 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이 겹겹이 스쳐 지나갑니다. 비 오는 날이라고 하면 스산하고 울적할 수도 있는데, 화가가 바탕색을 따스한 분홍으로 골라 쓴 덕분에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 ▲ 작품2 - 줄리언 오피 ‘비치 헤드 5(Beach Head 5)’ 2017.
사람 신체 중에서 우리가 감정을 읽을 수 있는 표정이 집중된 곳은 얼굴의 눈·코·입이에요. 하지만 오피가 그린 사람 얼굴에는 눈·코·입이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얼굴 대신 오피는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표정을 강조하고 있어요. 걸음은 얼마나 가벼운지, 질질 끄는지 톡톡 튀는지, 종종거리며 걷는지 아니면 쭉쭉 뻗으며 걷는지, 어깨가 축 늘어져 있지는 않은지…. 이런 걸 살펴보면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 사람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오피가 그린 사람 모습은 아주 간결해요. 작품2를 볼까요? 검은색으로 두껍게 테두리가 있는 둥근 옆 얼굴을 보니, 교통 표지판이나 알림판에 그려진 그래픽 스타일의 인물 같아요.
지난 10년간 오피는 전통적 초상화에서부터 이집트 상형문자, 일본 목판화, 심지어 공공 표지판에서까지 두루 영감을 받아 현대사회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풍겼던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연두색이나 분홍색 등 바탕색을 신중하게 선택하곤 했지요.
- ▲ 작품3 - 줄리언 오피 ‘멜버른 걷기(Walking in Melbourne)’ 2017.
작품3에서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걸어가요. 걸어가는 사람들 얼굴은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없는 것 같아요. 버스 정류장이나 카페 창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얼굴보다는 그 사람 차림새를 더 눈여겨보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오피가 그린 현대인은 얼굴보다는 차라리 개성이 돋보이는 차림새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 ▲ 작품4 - 줄리언 오피 ‘멜버른 걷기(Walking in Melbourne)’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