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끔찍한 '킬링필드' 끝냈지만… 32년째 反美 독재 오명

입력 : 2017.11.30 03:07

[훈센 총리와 킬링필드]

극단적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 루주'… 수용소 만들어 200만명 학살했죠
캄보디아 최장 독재자 훈센 총리… 내년 총선 앞두고 야당 해산 강행

얼마 전 캄보디아 대법원이 제1야당에 대해 '미국과 결탁해 쿠데타를 도모했다'는 혐의로 해산을 명령했어요. 국제사회는 캄보디아를 32년째 통치하고 있는 독재자 훈센 총리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야당을 해산해 장기 집권하려는 속셈을 드러냈다며 비난했지요.

미국도 야당 해산에 반대하며 앞으로 경제 원조를 끊겠다고 위협을 했는데요. 이에 대해 훈센 총리는 "미국의 원조 중단을 환영한다. 외국 원조를 받겠다고 독립성과 주권을 잃을 수 없다"고 했답니다. 이 같은 훈센 총리의 거침없는 독재는 그가 캄보디아 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인 '킬링필드(Killing Fields)'를 끝낸 주인공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얘기가 많아요.

◇베트남전으로 파괴된 캄보디아

수세기 동안 크메르 왕국(앙코르 왕국)으로 눈부신 문명을 이루었던 캄보디아는 15세기 이후 왕조가 쇠퇴하면서 태국·베트남의 침략을 번갈아 받았어요. 19세기 중반 프랑스 식민지가 된 캄보디아는 1953년에야 독립했지요. 당시 국왕이었던 시아누크는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선거에 나가 총리가 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어요.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학살당한 킬링필드 피해자들 유골을 모아놓은 기념탑.
캄보디아 훈센 총리가 장기 독재를 시도하고 있어요. 훈센 총리의 독재 이면에는 킬링필드의 끔찍한 역사에 대한 기억이 도사리고 있답니다. 사진은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학살당한 킬링필드 피해자들 유골을 모아놓은 기념탑. /게티이미지코리아
그즈음 캄보디아의 이웃나라이자 오랜 앙숙이었던 베트남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어요. 북베트남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쪽으로도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하고 있었죠. 동남아시아 지역에 공산주의가 번지는 것을 막고 싶었던 미국은 1964년 북베트남을 공격합니다. '베트남전(1964~1975)'이 발발한 것이지요.

그런데 세계 최강 군사력을 자랑하던 미국이 베트남전에선 고전을 면치 못했어요.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동부지역 울창한 밀림 속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쳤기 때문이에요. 미군은 캄보디아 내 북베트남군 근거지에 폭탄을 퍼부었고, 이 공격으로 수십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사망했어요. 이 사건으로 살아남은 캄보디아인들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됐지요.

이런 상황에서 1970년 친미 성향 군인인 론 놀이 쿠데타를 일으켜요. 하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은 친미 정권보다 급진 공산주의 무장단체 '크메르 루주(Khmer Rouge·붉은 크메르라는 뜻)'를 더 많이 지지했어요. 수백 명에 불과했던 크메르 루주 세력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중국 등 주변 공산국의 지원을 받으며 더 강력한 무장단체가 됐어요. 주요 도시들을 장악해나간 크메르 루주는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점령하고 론 놀 정부를 무너뜨렸습니다.

◇광기로 가득 찬 대학살, 킬링필드


캄보디아는 어떤 곳?
당시 크메르 루주를 이끌던 지도자는 폴 포트(1928~1998)였어요. 부농의 집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공산주의에 빠졌지요. 프놈펜을 점령한 폴 포트는 "지금부터가 서기 0년"이라며 나라 이름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으로 바꾸고 온갖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펼쳤어요.

우선 국민들 삶을 기계처럼 획일화했어요. 폴 포트 정권 아래 캄보디아인은 결혼 상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같은 호칭도 나쁜 관습이라고 못쓰게 했고 상대방을 오직 '동무'라고만 불러야 했지요. 모든 종교 행위가 금지돼 전국의 불교 사찰이 문을 닫았고, 자유로운 예술 활동도 일절 할 수 없었어요.

폴 포트는 모든 인민이 농업에 종사하는 사회를 이상적이라 생각했어요. 도시는 자본주의에 물든 부패한 곳이라고 여겼지요. 그래서 도시민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집단농장에 배치했지요. 사람들은 새벽 5시부터 늦은 밤까지 일만 해야 했고, 실수할 때마다 감시자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았어요.

크메르 루주는 도시마다 수용소를 만들어 자본가나 의사, 교수, 법조인, 과학자 같은 지식인들을 가뒀어요. 나중에는 손이 매끄럽거나 안경 쓴 사람, 집에 책이 많은 사람, 승려나 예술가처럼 노동하지 않는 사람을 모두 수용소로 끌고 갔어요. 이들은 노예처럼 쇠사슬에 묶인 채 일을 했고, 먹을 것이 없어 뱀이나 쥐, 귀뚜라미를 잡아먹었어요. 잔인한 고문과 처형도 끊이지 않았지요.

가장 악명 높던 수용소는 프놈펜에 있는 'S-21'이었는데요. 이곳에 수용된 2만여 명 가운데 살아나간 사람은 10여 명뿐이라고 해요. 크메르 루주가 집권했던 1975~1979년 무려 200여만명이 학살당했는데, 말 그대로 '죽음의 땅(킬링필드)'이었던 거지요.

◇반미(反美) 독재자 vs 킬링필드 종식 영웅

훈센 총리는 원래 크메르 루주 간부 출신이었지만 1977년 폴 포트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베트남으로 망명했어요. 그는 미국이 베트남전 당시 캄보디아에 폭탄을 퍼부었고, 베트남·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크메르 루주 정권을 지원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해 큰 반감을 갖고 있었어요.

1979년 훈센 총리를 비롯한 반(反) 크메르 루주파가 베트남군을 앞세워 캄보디아를 공격합니다. 이들은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보디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했어요. 1985년 34세 나이로 세계 최연소 총리에 오른 훈센 총리는 지금까지 공동·단독 총리를 오가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지요.

훈센 총리는 '아시아에서 가장 영악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요. 대표적인 친(親) 중국·베트남 지도자이면서 미국 등 서구 국가들로부터 각종 경제적 지원을 적절하게 받아내 왔고, 1998년 총선 승리를 위해 크메르 루주 세력과 연합하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당시 그는 "땅을 파서 과거를 묻고 오점(汚點) 없는 21세기를 향해 나아가자"고 했답니다.

훈센 총리는 노회한 반미(反美) 독재자, 킬링필드를 끝낸 위대한 지도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아요. 훈센 총리가 장기 독재의 길을 택한 캄보디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