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독립문, 사대주의 상징 헐고 佛 개선문 본떠 만들었죠

입력 : 2017.11.28 03:11

[독립문 건립 120주년]

명나라 사신 맞던 영은문·모화관
자주독립 널리 알리려 건물 허문 뒤 독립협회 주도로 독립문 세웠어요
일제시대 거쳐 항일 독립 상징으로

지난 20일은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을 세운 지 120주년을 맞는 날이었어요. 독립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로, 우리나라 자주독립 정신을 알리고자 만들었는데요. 놀랍게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선 큰돈을 들여 독립문 보수 공사를 벌이기도 했고, 문화재로 지정하기도 했어요.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제가 어째서 그런 일을 벌였을까요?

◇중국 사신이 머물던 영은문을 허물다

"임금이 왕세자와 백관(여러 신하)을 거느리고 모화관으로 나아가서 칙서(임금이 내리는 문서)를 맞이하였다." "모화관에 거동하여 사신을 전송하였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모화관(慕華館) 이야기예요. 이와 비슷한 내용이 '세종실록'뿐 아니라 마지막 조선왕조실록인 '고종실록'까지 거의 모든 실록에 빠지지 않고 나오지요. '모화관'이라는 곳에서 조선 임금이 중국, 즉 명나라나 청나라 황제가 보낸 사신을 맞이하거나 그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베푼 뒤 중국으로 떠나보냈다는 말이에요.

이처럼 '모화관'은 조선에서 중국 사신을 영접하려고 지은 건물로,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라고 할 수 있어요.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 때인 1407년 고려 도읍지 개경에 외국의 여러 사신을 맞이하려고 지었던 영빈관을 본떠 서울의 사대문 중 하나인 서대문(돈의문) 밖에 만들었지요. 지을 당시 이름은 '모화루'였는데 세종 때인 1430년 '모화관'으로 바뀌었어요. 그리고 모화관 앞에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인 홍살문을 세웠는데, 제11대 임금 중종 때 홍살문에 청기와를 입혀 고쳐 지으면서 명나라 사신이 요구한 대로 '영은문'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모화관의 '모화(慕華)'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고, 영은문의 '영은(迎恩)'은 은혜를 베푼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에요. 이름처럼 큰 나라를 섬긴다는 조선의 사대주의 정책에 따라 지어졌답니다.

시대에 따라 모화관은 여러 용도로 쓰기도 했어요. 1427년(세종 9년)에는 군인을 뽑는 무과(武科) 시험을 이곳에서 보았고, 1457년(세조 3년)에는 함경도 호족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세조가 직접 행차해 군사훈련 상황을 살펴봤지요. 관직을 얻지 못한 무관(군인)의 자제들은 모화관 활터에서 활을 쏘는 궁술을 익히기도 했답니다.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다

1895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1년 가까이 벌어진 이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조선은 더는 청나라를 섬기는 나라가 아니라 자주독립 국가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를 위해 사대주의의 상징이었던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을 세워야 한다는 운동이 벌어졌지요.

미국에 망명했다가 귀국해 189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민간인이 만든 것) 신문 '독립신문'을 발간한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과 이완용·안경수 등 당시 조선 정부 관료들이 참여해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이를 바탕으로 '독립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들이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모금 운동을 벌였답니다.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정서용

독립문 모양은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 서재필이 스케치했어요. 조선 왕실도 큰돈을 기부했지요. 1896년 11월 21일 시작된 독립문 설립 공사는 이듬해인 1897년 11월 20일 끝났답니다. 모화관은 독립협회의 집회·모임 장소인 '독립관'으로 사용하기로 했지요.

독립문이 완공되기 한 달여 전쯤인 1897년 10월, 고종 임금이 독립협회 지원에 힘입어 '대한제국'을 선포해요. 이로써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답니다. 독립문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와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을 새긴 것도 그 때문이에요.

1910년 우리나라가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자, 일제는 독립문을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 일본 영향 아래로 들어왔다'는 의미로 이용하려고 했어요. 이에 조선총독부는 독립문 보수 공사를 벌이고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기도 했지요. 또 이완용 등 친일파가 당시 독립문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독립협회 회원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한국인의 반일(反日) 감정을 누그러뜨리려고 했답니다.

독립문은 일제강점기가 길어지면서 일제로부터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의미가 바뀌어 갔어요. 1919년 3·1운동 때는 태극기의 정확한 모양을 알지 못했던 많은 학생과 시민이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를 보고 따라 그리며 만세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요. 이후 독립문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자주독립의 상징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답니다.

☞독립문 글자는 누가 썼을까

독립문에 새겨진 한자·한글 현판글씨는 친일파인 이완용이 썼다는 설이 많아요. 독립문을 세울 당시 독립협회 위원장을 지냈고, 건립 때 가장 많은 돈을 기부했기 때문이지요. 일제시대 한 일간지에는 ‘독립문 현판 글씨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라는 글이 실렸어요.

반면 독립운동가인 김가진이 쓴 것이란 주장도 있어요. 그 역시 독립협회 창립 회원이었고, 당대 글씨를 가장 잘 쓰는 사람으로 소문나 여러 현판 글씨를 도맡아 써왔기 때문이지요. 그의 필체와 독립문 필체가 비슷하다는 감정도 있답니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