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상상과 현실은 한 끗 차이… 환상 뒤섞인 세상 보여줘요

입력 : 2017.11.11 03:04

[서울대 미술관 '포스트모던 리얼展']

다양한 실험 시도한 '포스트모던'
뾰족하게 솟은 건물은 로켓처럼, 가짜 궁전은 더 가짜같이 그려내
현실에 대한 작가 해석 보여줘요

화가는 무언가를 꼼꼼히 관찰하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지요. 하지만 바라본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장면을 볼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마치 사실인 양 그려 넣기도 하지요. 그래서 그림 속 풍경에는 실제로는 그 어디에도 없는 장소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6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인문학자였던 토머스 모어(1478~1535)는 '유토피아'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데,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유토피아라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지요. 이 책의 내용은 앞쪽 반은 영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고, 뒤쪽 반은 어떤 살기 좋은 나라에 대한 상상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 뒷부분에 나오는 배경이 바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섬나라, 유토피아랍니다.

모어는 책 속에서 유토피아를 직접 가보지는 못하고 그곳에서 살다 왔다는 라파엘이라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지요. 수염이 길고 피부가 햇볕에 검게 그을린 라파엘은 '유토피아가 어떤 곳이냐'는 모어의 질문에 이렇게 답해줍니다. "시민들은 적당히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독서나 취미를 즐긴답니다."

작품1~4
어떤가요? 전혀 일하지 않고 마냥 먹고 놀고 즐기는 지상낙원으로서의 유토피아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요? 모어가 묘사하는 유토피아는 생각보다 현실의 삶과 가까운 것 같아요. 다만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그곳에서는 겪지 않을 뿐이지요.

오늘 우리가 미술 작품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하려는 것도 현실과 상상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비슷하면서 애매모호하게 다른 한 끗 차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디까지가 실재이고 어디서부터가 상상인지 우리에게 게임을 하자고 하는 것 같은 작품들은 지금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포스트모던 리얼' 전시에서 오는 28일까지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작품1을 볼게요. 가운데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이 유독 눈에 띄는데, 마치 로켓처럼 하늘로 치솟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로켓을 가만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건물을 닮았네요. 서울의 랜드마크(land mark·어떤 지역을 대표하거나 주변과 구별지어주는 사물)가 된 어떤 고층 빌딩이 로켓으로 변신해 발사되는 상상의 장면이군요. 사실 이 빌딩은 너무나 높아서 나지막한 주변에서 저 혼자 불쑥 솟아오른 듯 보이거든요. 김원화 작가는 그것을 우주 탐사용 로켓으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작품2에서는 두 남녀가 자동차를 타고 초원을 달리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조금 어색해 보입니다. 그 이유는 남자가 자동차를 실제로 운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흉내만 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자동차는 영화를 촬영하는 세트장에 놓여있고, 배경의 초원도 이미지로 처리됐답니다.

영국의 유명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세상은 무대이고 인생은 연극"이라고 말한 바 있지요. 정연두 작가 역시 우리의 인생은 불완전한 세트장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부러 세트장 분위기가 물씬 풍기도록 장면을 연출했어요. 덕분에 그 장면이 가짜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밝힌 셈이 되었지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백승우 작가는 작품3에서 진짜와 가짜 사이의 틈새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사진은 북한의 선전용(宣傳用·주장이나 존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이미지를 흉내 내 만든 것인데, 실제 장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작가는 대신 이미지를 세로선으로 구획해 사진 속 건물이 저 건너 동떨어져 있는 금지된 장소 같은 느낌을 냈지요.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인공 도시를 보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어요.

한운성 작가는 작품4에서 그림 속 그림을 보여줍니다. 놀이공원에 가면 동화 속 배경이 되는 아름다운 성이나 궁전이 있지요. 이 작품은 놀이공원 입구에 세워진 궁전 그림 속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그린 것이에요. 놀이공원 내 궁전은 실제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가짜 집'이지요. 궁전도 가짜인데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 세워놓으니 이중으로 가짜가 되는 장면이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속에는 사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환상과 허구가 뒤섞여 있지요.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전시 제목에 쓰인 '포스트모던'이란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재현(再現)중심주의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상주의를 거부하고 작가 개개인의 시선을 통해 다양한 예술 실험을 하는 20세기 중·후반 미술 운동을 가리킨답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