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점·선·면으로 만든 도형, 아름다움 그리는 최고의 도구죠

입력 : 2017.11.04 03:04

[도형과 미술]

칸딘스키, 동그라미 겹쳐 작품 그려 공간감·리듬감 등 여러 느낌 표현
도형만 이용하는 '절대주의' 화풍과 문양 반복하는 '쪽매맞춤'도 있어요

원(동그라미),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등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양입니다. 이것을 도형이라고 해요. 도형은 점·선·면 등이 모여 만들어지는데 크게 평면도형과 입체도형으로 나눌 수 있어요. 도형은 많은 예술가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었어요.

대표적 예술가로 20세기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를 꼽을 수 있어요. 칸딘스키는 기본 도형인 원을 이용해 작품1을 그렸어요. 단지 원 한 가지만 그렸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크기와 색, 밝기가 각각 다르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원들이 겹쳐지거나 떨어져 있고 반복되도록 배치했어요.

왜 원만으로 그림을 그렸을까요? 또 원들에 다양한 변화를 준 의도는 무엇일까요? 칸딘스키는 여러 도형 중에서 '가장 완전한 도형'으로 불리는 원을 무척 좋아했다고 해요. 여러 원을 겹치거나 떼어놓은 이유는 중첩하거나 거리를 두면 공간감과 깊이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원을 반복해 그린 것은 음악적 리듬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고요. 이런 설명을 바탕으로 작품을 감상하면 그림 속 원들이 마치 드넓은 우주 공간 속 궤도를 돌고 있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행성들처럼 느껴질 거예요.

작품1~4
작품1 - 바실리 칸딘스키, 여러 개의 원(Several Circles), 1926. 작품2 - 카지미르 말레비치, 슈프리마티즘 2차원의 자화상(Suprematism, Self Portrait in Two Dimensions), 1915. 작품3 - 김재관, cube-Secretness 12-2001, 2012. 작품4 -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 도마뱀(Reptiles), 1943.
20세기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에게 도형은 순수한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도구였어요. 작품2에 원, 정사각형, 사다리꼴 등 기하(도형·공간의 성질을 뜻하는 말) 도형이 등장했어요. 말레비치는 도형이 신성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어요. 수정처럼 맑고 고요한 정신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도구는 기하 도형뿐이라고 굳게 믿었거든요.

그는 현실 세계가 아닌 이상 세계를 꿈꾸었던 화가였어요. 순수하고 엄숙하며 본질적인 진리를 담은 그림만이 위대한 예술이라고 생각했어요. 따라서 현실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주제나 소재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어요. 오랜 연구와 실험을 거쳐 기하 도형만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말레비치표 화풍을 개발했어요.

바로 미술사에서 '절대주의(Suprematism)'라고 부르는 혁신적 화풍이 태어난 거죠. 절대주의는 '최고의 질서'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이 그림은 기하 도형이 절대적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답니다.

한국 작가 김재관도 기하 도형이 아름다움의 원형(原型)이며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믿고 있어요. 작품3 속 입방체(육면체)를 관찰해보세요. 언뜻 같아 보이지만 똑같은 입방체는 단 한 개도 없어요. 색, 형태, 각도에 크고 작은 변화를 주었거든요. 질서와 생동감,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서로 다른 요소를 융합하기 위해서였어요.

왜 평면도형이 아닌 입체도형을 선택했을까요? 평면 그림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어요. 캔버스는 2차원, 입체도형은 3차원(3D)입니다. 평면 그림에 입체도형을 실감나게 표현해 3차원 효과를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했어요. 관객이 다른 두 공간인 2차원과 3차원 공간을 그림을 통해 동시에 체험하도록 말이죠.

기하 도형을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이 작품은 겉으로는 무질서하게 보이는 자연의 이면에 기하학적 구조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아울러 기하 도형이 질서와 비례, 율동과 리듬, 깊이감과 공간감, 부피와 무게감까지 표현할 수 있는 창작 도구라는 점도 일깨워줍니다.

네덜란드 판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영어명 에셔)도 기하 도형의 아름다움을 작품4에 담았어요. 바닥에 펼쳐진 그림책을 꼼꼼히 살펴보세요. 흰색, 회색, 검은색으로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은 모양의 도마뱀들이 빈틈없이 그려져 있어요. 놀랍게도 도마뱀 모양이 모두 정육각형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게다가 정육각형 도마뱀들이 생명을 얻어 책, 삼각형, 다각형 위를 기어 다니다가 다시 그림으로 되돌아갑니다.

에스허르는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장식한 이슬람 미술의 문양 기법인 '테셀레이션'에서 정육각형 도마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우리말로는 '쪽매맞춤'인 테셀레이션은 같은 모양을 반복적으로 배치해 평면이나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는 기법을 말해요.

에스허르는 이슬람 미술이 신비하도록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그 이유는 테셀레이션을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아냈어요. 아름다움의 비밀을 발견한 에스허르는 오랫동안 테셀레이션을 연구해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으로 재창조했답니다.

오늘 감상한 작품들은 도형이 미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 왔다는 점을 알려줘요. 덕분에 '기하 도형은 아름다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그 자체'라는 말이 생겨난 배경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