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 중국에 시장경제 도입했죠
[중국의 최고 지도자들]
건국 이끈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 주도했죠
덩샤오핑, 개혁·개방 정책 추진하고 차기 후계자 지명 전통 만들었어요
중국 최고 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가 '집권 2기'의 문을 열었어요. 최근 폐막한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당헌(정당의 기본 방향)에 자신의 이름을 달아 '시진핑 신(新)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넣은 거에요. 많은 언론이 "시진핑이 마오쩌둥만큼 강력한 권력을 구축했다"는 분석을 내놨답니다.
오늘은 마오쩌둥에서부터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이끌어온 최고 지도자들 이야기를 해볼게요.
◇두 얼굴의 마오쩌둥
- ▲ 마오쩌둥
중국 최초의 최고 지도자는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에요. 그는 '건국의 아버지'이자 '공산주의 독재자'라는 두 얼굴을 가진 혁명가랍니다. 중국 후난성의 한 마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공산주의에 매혹돼 중국 공산당원으로 활동했어요.
그러던 중 공산당이 장제스(훗날 대만 최고 지도자)의 국민당 군대에 궤멸당할 위기에 놓이자,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1년여간 무려 1만2500㎞를 이동하는 '대장정'에 올랐지요. 마오쩌둥과 당원들은 하루 40㎞ 이상 행군해 국민당의 추격을 따돌렸답니다. 이를 통해 공산당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은 1945년 국민당과 치열한 내전을 벌여 승리합니다. 그는 1949년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고 중국의 최고 권좌인 '주석'에 올랐어요.
마오쩌둥은 중국을 산업화한 강대국으로 발전시키겠다며 1958년 '대약진 운동'을 펼쳤어요. 하지만 노동 착취와 대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으며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납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주석에서 물러났지요.
제2대 주석으로 공산당 내 서열 2위였던 류사오치(劉少奇·1898~1969)가 오릅니다. 류사오치는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능력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인민이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마오쩌둥과 반대되는 사상이었지요. 마오쩌둥은 1966년 류사오치 등을 향해 '농민을 착취하고 자본주의를 끌어들이고 있다'며 공격했답니다. 많은 학생과 청년층이 마오쩌둥 주장에 동조하면서 중국 전역에서 '문화대혁명(1966~1976)'이 벌어졌지요.
'문화대혁명'은 지주·자본가 계급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극단적 공산주의 운동이었어요. 마오쩌둥은 이를 통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몰아냈지요. 그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홍위병'들은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다니며 중국 고유 전통을 부정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반(反)공산주의 세력으로 몰아 제거했어요. 이 과정에서 류사오치도 숙청당한 뒤 외딴 곳에서 홀로 죽었지요. 그러나 류사오치의 생각은 이후 중국을 이끌어 나가는 실용주의 사상의 뿌리가 됐답니다.
◇'시장경제 사회주의' 이끈 지도자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이 권력을 장악했어요. 덩샤오핑은 폐쇄적 공산 국가였던 중국을 개혁·개방의 길로 이끈 설계자랍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자본주의를 따르는 부르주아'라는 비판을 받고 농기구 만드는 공장으로 쫓겨났던 그는 최고 실권자가 된 뒤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하기 시작했어요.
덩샤오핑이 남긴 말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이 바로 '흑묘백묘(黑猫白猫)'예요. 직접 미국·일본 등 강대국을 방문해 자본주의를 살펴본 그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중국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라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상관없다"고 주장했지요.
이후 중국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를 따르는 독특한 나라가 됩니다. 덩샤오핑은 광둥성 등 네 지역을 경제 특구로 지정하고 상하이·광저우 등 열네 도시를 외국에 전면 개방했어요. 서구 자본이 본격 유입되면서 중국 경제는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빈부 격차가 커지고 지도층의 부패 사건이 잇따르자,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1989년 6월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여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어요.
이 집회는 공산당 총서기였던 호요방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위에서 출발했지만, 사실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오랜 불만을 드러낸 것이었죠.
시위는 지방 도시까지 번졌고, 덩샤오핑은 군대를 앞세워 시위대를 진압했지요. 이 때문에 덩샤오핑은 오래도록 많은 비판을 받았답니다.
- ▲ 최근 열린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최고 지도자 시진핑 국가주석이 당대회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고 있어요. /AP 연합뉴스
많은 중국인이 덩샤오핑을 '중국을 경제 대국으로 이끈 위인'으로 평가해요.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1997년 공산당 당헌에 명기됐지요. 또 그는 다음 후계자에게 권력을 넘기면서 차차기 지도자까지 미리 정해 권력 구도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전통도 만들었답니다.
덩샤오핑 뒤를 이어 최고 지도자가 된 사람은 장쩌민(江澤民·91)이에요. 1926년 장쑤성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전기 기술자, 식품 공장 총책임자 등으로 일한 전문가였어요. 옛 소련으로 유학을 다녀온 후 만주 지역에 자동차 공장을 세운 사업가이기도 했답니다.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 시기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부르주아'로 몰려 농장으로 쫓겨나기도 했지요.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강력하게 이어 나갔어요. 중국은 연평균 9.4%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했지요. 장쩌민은 국가주석 임기를 10년으로 제도화하고 집권 2기 당대회에서 다음 후계자를 지명하는 권력 승계 시스템을 안착시켰답니다.
이후 중국 최고 지도자는 후진타오(胡錦濤)에 이어 시진핑 현 주석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시진핑은 집권 2기를 알리는 이번 당대회에서 다음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아 논란이 됐답니다. 후계자 지명을 천천히 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 궁극적으로 10년 이상 '장기 집권'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지요. 시진핑 이후 중국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변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