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중세유럽, 근거 없는 죄 씌워 처단… 수십만 명 희생당해

입력 : 2017.10.19 03:13

[마녀사냥]

가톨릭 외 '이단' 심판하던 종교재판… 수백년 동안 무차별 탄압으로 변질
무고한 여성, 마녀로 몰아 사형했죠

덮어놓고 비난하는 '마녀사냥' 유래

얼마 전 "아이가 혼자 내렸으니 세워 달라"고 호소하는 엄마의 말을 버스 운전기사가 무시하고 심지어 욕까지 했다는 목격담이 인터넷상에 퍼져 논란이 일었어요. 조사 결과 버스 운전기사는 원칙대로 행동한 것이고 욕도 하지 않은 걸로 밝혀졌는데요. 이미 네티즌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은 버스 운전기사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며칠간 운전대도 잡지 못했다고 해요. 사람들은 "버스 운전기사에게 덮어놓고 '마녀사냥'을 했다"고 말했죠.

이처럼 우리 사회에는 별다른 근거 없이 특정인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무차별한 공격을 하는 현상들이 적지 않아요. 이를 '마녀사냥'이라고 해요. 특히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유명한 사람들의 경우 잘잘못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덮어놓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아요. 오늘은 실제 역사 속에서 '마녀사냥'이 어떻게 일어났었는지 알아볼게요.

◇이단 심판 위해 만든 종교재판

11~12세기 유럽에서는 이단(異端), 즉 정통학설에서 벗어나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종교 집단을 심판하기 위한 '종교재판'이 만들어졌어요. 당시 이단은 로마 가톨릭 이외의 다른 기독교 분파였죠. 초기에는 이단을 심판하는 절차가 까다로워 종교재판이 잘 열리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13세기 무렵 교황이 직접 종교재판관을 임명하고 증거 없이 의심만으로 이단자를 고발해 처벌할 수 있는 제도가 갖추어졌어요.


영국 화가 윌리엄 포웰 프리스(William Powell Frith)의 1848년 작품‘마녀 재판(The Witch Trial)’.
영국 화가 윌리엄 포웰 프리스(William Powell Frith)의 1848년 작품‘마녀 재판(The Witch Trial)’. /위키피디아
십자군전쟁이 실패하고 가톨릭 교회의 부패가 심해지자 14세기 유럽에선 교회의 권위가 점점 떨어집니다. 이에 따라 기존 가톨릭 교리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그러자 교회는 종교의 권위를 되살리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이단을 탄압하는 종교재판을 활용했어요. 재판관들은 이단을 뿌리 뽑겠다며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몰아 화형하는 등 과격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일부 정치 세력은 종교재판을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기도 했어요.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십자군전쟁 때 많은 공을 세운 템플 기사단(예루살렘·팔레스타인 등에서 활약한 기사들의 모임)을 이단으로 몰아 종교재판에 세우고 그들의 재산을 압류했죠.

사실 마녀라 불리는 사람들은 중세 이전부터 있었어요. 대부분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거나 여성의 출산 등을 도와주는 '주술사' 같은 존재였죠. 그러나 출산 중 태아와 산모가 죽거나 치료하던 환자가 죽는 일이 생기면 불길한 존재로 낙인 찍혀 손가락질 받기도 했어요.

15세기 후반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악마와 계약을 맺은 마녀가 실제 존재하며 이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선언했어요. 그즈음 신학자이자 종교재판관이었던 하인리히 크라머와 야콥 슈프랭거가 마녀에 대한 학설을 총망라해 쓴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라는 책도 출간했죠. 마녀사냥의 필요성과 방법을 소개한 이 책은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전 유럽으로 확산했고, 18세기까지 무려 29판이나 찍으면서 큰 인기를 얻었어요.

이후 유럽인들은 마녀가 실제로 있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마녀를 색출해 죽이는 것이 그들의 신앙과 가족, 마을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죠. 그 결과 16~17세기 유럽에서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목숨을 잃었답니다. 종교재판은 마녀 재판과 동일시됐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마녀사냥도 이때 집중적으로 벌어졌어요.

◇광기로 물든 마녀 재판

유럽의 광기 어린 마녀사냥 뒤에는 비(非)이성적인 사법 절차가 있었어요. '누가 마녀라더라'하는 소문만 돌아도 체포가 가능했죠. 재판관은 어떤 지역에 흉년이 들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교회 십자가가 망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였어요. 마녀로 지목받은 사람이 심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마녀라고 주장하면, 그 사람도 마녀로 체포했고, 마녀의 자식들은 당연히 마녀로 생각했어요.

마녀로 의심받는 사람이 진짜 마녀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방법도 비합리적이었어요. 모진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것은 기본이었고, 무거운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지는 방법을 가장 많이 썼지요. 물 위로 떠오르면 사람이 아닌 마녀인 것이 맞으니 화형에 처했고, 물에 빠져 죽으면 마녀가 아니라는 게 증명되는 식이었어요. 어떻게 되든 의심받는 사람은 죽는 거예요.

마녀사냥의 희생자는 대부분이 신분이 낮은 여성이었지만, 마녀사냥이 확산되면서 남성들도 마법사로 몰려 죽었어요. 그 중의 한명이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작은 도시인 밤베르크시 시장을 지냈던 유니우스예요. 유니우스는 1628년 마법을 썼다는 혐의로 고소당해 재판정에 섰어요. 여러 사람이 그가 마법을 썼다고 증언했지만 유니우스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죠. 재판관들은 유니우스의 몸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은 징표를 찾는다면서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결국 유니우스는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시인합니다.

"돈 문제로 고민하다가 악마의 꾐에 빠졌습니다. 하느님을 버리고 악마의 일원으로 '크릭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악마 중 한 명과 연애를 했고 그녀를 만날 때는 검은 개로 변신을 했습니다."

이처럼 유니우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고, 재판관들은 이 말에 크게 만족하며 유니우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답니다. 결국 그는 화형에 처해졌어요.

18세기 후반 이성주의가 확산하고 근대 사법 제도가 자리 잡으면서 마녀 재판은 점차 사라졌어요. 그러나 분명한 건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중세가 아니라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가 꽃피우기 시작했던 16~17세기였다는 사실이에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우리 안의 비(非)이성을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든 마녀사냥은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될 수 있으니까요.

[잔 다르크와 마녀사냥]

백년전쟁은 1337~1453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을 말해요. 영국에 유리했던 전쟁 분위기는 프랑스의 10대 소녀 잔 다르크가 등장하면서 바뀌어요. 잔 다르크는 "프랑스 왕을 도우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전쟁에 뛰어들어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높인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1431년 영국군은 잔 다르크를 포로로 잡고 '마법을 썼다'며 그를 마녀로 몰아 화형했답니다.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