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세계 최대 유랑 민족' 수천년 중동 셋방살이 끝날까

입력 : 2017.09.28 03:07

[쿠르드족의 독립]

중동 곳곳 흩어져 살아온 쿠르드족, 14년 전 이라크에 자치정부 세웠죠
최근 완전 분리·독립 묻는 주민투표… 주변국, 정세 급변 우려로 반대해요

여러분은 '세계 최대 유랑(流浪·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님) 민족'이 누군지 알고 있나요? 바로 쿠르드족이에요. 쿠르드족은 인구가 무려 3500만명에 이르지만 독립된 나라를 갖지 못하고 터키·이란·이라크 등 중동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아왔어요. 그래서 '중동의 집시(유럽의 대표적인 유랑 민족)'라고도 불린답니다.

그런 쿠르드족이 지난 25일(현지 시각) 이라크로부터의 분리·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했어요. 쿠르드족은 2003년 이라크 북부 지역에 쿠르드자치정부(KRG)를 세웠는데, 이제는 아예 이라크로부터 독립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이라크는 물론 미국·이란 등 많은 나라의 반대 속에 치러진 이번 투표의 참가율은 78%로 독립 찬성이 압도적으로 높을 것으로 예상된답니다.

◇침략으로 얼룩진 쿠르드 민족사

쿠르드족은 터키 동남부와 아르메니아 남부, 이란 고원의 중앙부, 이라크 북부 등을 아우르는 거대한 산악지대에 거주해 온 유목 민족(가축을 키우며 이동 생활을 하는 민족)이에요. 이 지역을 쿠르드족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쿠르디스탄'이라 불러요. 평균 해발고도 3000m인 이 고원지대에서 쿠르드족은 약 4000년 전부터 살아온 것으로 추정돼요. 쿠르드족은 이란어파에 속하는 독자적인 언어인 쿠르드어를 사용하고, 고유의 생활 풍습도 가지고 있답니다.

기원전 2200년쯤 이 지역에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영향을 받은 도시국가 쿠틸 등이 세워져요. 쿠르드족이 세운 나라들이죠. 기원전 8세기쯤엔 쿠르드족이 메데(Medes) 왕국을 세우는데 성경에 나오는 '메데인(용감한 전사라는 뜻)'이 바로 쿠르드족을 가리킨답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아디아베네 공국, 폰투스 공국 등 여러 쿠르드 공국(왕이 아닌 귀족이 다스리는 작은 나라)이 여기저기 생깁니다.

지난 17일 레바논 베이루트 도심에서 시위대가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KRG)의 분리·독립 투표를 지지하는 집회를 갖고 쿠르드족 깃발을 흔들고 있어요.
지난 17일 레바논 베이루트 도심에서 시위대가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KRG)의 분리·독립 투표를 지지하는 집회를 갖고 쿠르드족 깃발을 흔들고 있어요. /AP 연합뉴스

이후 쿠르드 지역은 고대 이란 왕국인 파르티아 왕국,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잇달아 받습니다. 피지배(지배를 받음)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7세기 이후부터 우마이야·아바스 왕조 같은 이슬람 왕국의 침략을 받으며 쿠르드족은 아랍인이 아니면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첫 번째 이민족이 돼요. 16세기부터는 오스만튀르크제국(오늘날 주로 터키)의 일부로 전락합니다. 17세기 이란 사파비 왕조가 쿠르드 지역 일부를 차지하면서 쿠르드족은 오스만·사파비 왕국 두 나라에 나뉘어 살게 되죠.

20세기 초 쿠르드족에 첫 번째 독립의 기회가 옵니다. 1920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이 전쟁에서 진 오스만튀르크제국과 '세브르 조약'을 맺은 거예요. 오스만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시리아·이라크·쿠르디스탄 등을 독립국가로 승인하고 오스만제국을 해체하라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오스만제국의 민족주의자인 케말 파샤가 이에 반발해 터키공화국을 수립하고 연합군과 새 조약을 체결하면서 세브르 조약은 무효가 됩니다. 쿠르디스탄 독립의 꿈은 좌절됐고, 쿠르드 지역은 터키·이란·이라크·시리아·아르메니아 등으로 찢어지게 되죠.

◇자치정부 세웠지만… 먼 독립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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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나라는 터키예요. 특히 동남부 지역에 전체 쿠르드 인구의 40% 정도인 약 1500만명이 살고 있죠. 터키 정부는 쿠르드족을 '산악 터키인'으로 부르며 쿠르드어 사용과 전통 의상 착용을 금지하는 등 탄압을 해왔어요.

이라크에는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쿠르드족 550만명이 살고 있어요. 지난 수십년간 쿠르드족은 이라크 정부에 독립을 요구하는 격렬한 무장 투쟁을 벌여 왔죠. 이라크 정부의 탄압도 지속돼 1980년대에는 쿠르드족이 이란을 도왔다는 이유로 이라크 정부가 쿠르드족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1990년 미국과 이라크 간 전쟁인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쿠르드인들에게 다시 독립의 희망이 생겨요. 전쟁에서 이긴 미국이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쿠르드 지역을 미군이 주권을 가진 비행 금지 구역으로 설정한 거죠. 쿠르드족을 이라크군으로부터 보호한 거예요. 2003년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자 쿠르드족은 자신들만의 자치정부(KRG)를 수립합니다. 이후 자치정부 대선, 총선 등을 치르며 독립을 향한 준비를 해나가죠.

쿠르드족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족을 모아 하나의 독립된 나라 '쿠르디스탄'을 건설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어요. 이번 주민투표는 그 열망의 상징이죠. 그러나 실제 독립국가 수립이 가능할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답니다. 너무 오랜 세월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민족적 동질성이 약해져 있고, 민족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도 없기 때문이에요.

이라크는 쿠르드 자치정부 내 도시인 키르쿠크에 이라크 전체 석유 매장량의 30~40%를 차지하는 유전(油田·석유가 있는 지역)이 있다는 점 때문에 독립을 반대하고 있고, 터키 등 이웃 나라들도 자기네 나라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까지 독립하겠다고 나설까 봐 반대하고 있죠. 미국 역시 중동 정세가 급변할까 봐 우려하고 있어요. 이번 주민투표로 수천년간 남의 나라에서 셋방살이를 해온 쿠르드족은 과연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을까요?

☞나라 없는 유랑 민족

‘집시’로 불리는 로마족은 대표적인 유랑 민족이에요. 북부 인도에서 살다 중세시대를 거치며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간 것으로 추정돼요.

유대인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고대 이스라엘 왕국에서 살다 기원전 8세기 무렵 나라가 멸망하면서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죠. 이들은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다시 세웁니다. 오랜 기간 러시아 등 강대국들 침략에 시달리며 흩어져 살던 아르메니아인들도 유랑 민족 중 하나였답니다.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