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민족주의·사회주의 생각 달라도… '독립' 위해 뭉쳤죠

입력 : 2017.09.19 03:15

[신간회]

사회주의·민족주의 최초로 합작, 항일민족운동단체 '신간회' 만들어
전국 140개 지회 최대 규모로 활동… 일제 탄압에도 민족운동 구심체 역할
신간회 초대 회장 지낸 이상재 선생, 을사오적에 "도쿄 가라" 말하기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에 있는 교남 YMCA회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절 3·1독립운동을 펼친 민족 지도자들이 모였던 곳이에요. 또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운동 등 여러 민족운동의 터전이 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죠. 그래서 근대 문화유산 가운데 보존과 활용 가치가 높아 나라가 별도로 지정해서 관리하는 등록문화재(제570호)가 되었어요.

얼마 전 이곳에서 신간회기념사업회와 조선일보사, 대구YMCA가 중심이 돼 '신간회 대구지회 활동 사적지 표지석 건립식'을 열었어요. 신간회 활동 표지석은 일제강점기 최대 항일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의 활동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앞으로 목포·통영 등 신간회 지회 활동 사적지가 남아 있는 8개 지역에 차례로 세워질 예정이라고 해요. 그렇다면 신간회가 일제 치하 어떤 활동을 벌였기에 이를 재조명하는 사업이 지금도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일까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손잡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의 승리로 막을 내렸어요. 독일의 항복을 받아낸 연합국 대표들은 프랑스 파리에 모여 전후 국제 질서를 논의하는 '파리평화회의'를 열고 독일의 전쟁 배상 책임을 묻는 내용의 '베르사유조약'을 조인해요. 이 같은 조약의 배경이 된 건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이 의회에서 주창했던 '14개 조항'이랍니다.

국제연맹 창설, 군비 축소, 공정한 무역 확립 등의 내용을 담은 윌슨의 '14개 조항'에는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어요. 이를 '민족자결주의'라고 부르죠.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국가 민족들은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었고, 그중에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던 우리나라도 있었어요.

1919년 3월 1일, 종로 파고다 공원을 중심으로 일제로부터 독립을 외치는 3·1운동이 일어납니다. 그해 일제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에 모여 임시정부를 세우고 임시헌법을 만들었죠. 일제의 압박과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의 독립을 이루려는 여러 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벌어진 거예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정서용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어요. 민족 독립이 가장 중요하며 이를 위해 지역과 계층을 뛰어넘는 민족 단결을 이뤄야 한다는 '민족주의자'들과, 농민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 계급의 해방과 민족의 독립을 동시에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이었죠. 이들은 서로 생각하는 바와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벌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던 1927년 2월, 이상재·안재홍·백관수·신채호·신석우·유억겸·권동진 등 여러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모여 통일된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읍니다. 이렇게 탄생한 단체가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란 표어 아래 설립된 '신간회'예요.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었는데 일제의 탄압 때문에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못했어요. 이 때문에 각 지방에 조직된 지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이 펼쳐졌죠. 1930년에는 전국 140여 지회, 회원 3만9000여 명을 확보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어요. 지회는 일본에까지 조직됐죠. 하지만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열려던 계획이 일제에 발각되면서 신간회를 이끌던 수많은 민족 지도자가 일제에 검거됩니다. 이후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조직 내분 등이 이어지면서 1931년 5월 신간회는 해체되고 말아요.

◇을사오적에 "도쿄로 이사 가시오"

신간회는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한 최초의 좌우 합작 단체라는 데 큰 의미가 있어요. 이렇게 생각이 다른 지식인들을 한데 이끌었던 신간회 초대 회장은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던 이상재(1850~1927) 선생이었는데요. 이상재 선생은 1914년 전국의 기독교 청년회(YMCA)를 한데 모은 '조선 기독교 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고 1924년 현재 보이스카우트의 전신인 조선소년척후단 총재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죠.

이상재 선생과 관련해선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아요. 이 선생이 을사오적, 즉 을사조약에 찬성해 서명한 조선 대신들이었던 이완용과 송병준을 만나 "도쿄로 이사를 가라"고 했던 일화는 유명해요. 두 사람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이 선생은 "대감들은 무엇이든 망하게 만드는 데 천재 아닙니까? 우리 조선을 망하게 했듯, 도쿄로 이사를 가면 일본도 망하게 될 테니까요" 하며 크게 웃었다고 해요. 일본에 조국을 넘긴 이들에게 뼈 있는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죠.

한번은 이상재 선생이 종로 YMCA회관에서 강연을 할 때였어요. 일본 순사들과 친일파 관리들이 청중 속에 숨어 이 선생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이 선생이 이를 눈치채고 갑자기 창문 너머 먼 산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허, 개나리가 만발하였구나!"

강연회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어요.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 순사를 뒤에서는 '개'라고 부르고 면전에서는 '나리'라는 존칭으로 불렀는데 둘을 합치면 '개+나리'가 된다는 풍자를 한 것이죠.

이상재 선생은 신간회 초대 회장을 맡은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장례는 1927년 4월 7일 한국 최초로 사회 각계 대표가 자발적으로 모여 거행하는 장례 의식인 사회장으로 치러졌답니다. 국내 129개 사회단체가 장례에 참여했고,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무려 10만명이 모였다고 해요. 당시 경성(서울) 인구가 3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가 민족운동가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는지 알 수 있죠?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